리플리 4 : 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리플리 4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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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의무감으로 몇 자 쓴다.

밑에 리뷰를 쓰신 분들은 아무 지적을 안 하다니 놀랍다. 실수가 이렇게 많이 눈에 띄는 책은 처음인 것 같다. 먼저 읽은 지하의 리플리, 리플리의 게임도 몇 군데 있었는데 방금 읽기를 마친 '리플리 4 : 리플리를 따라간 소년'은 정도가 좀 심했다. 어이가 없어서 발견될 때 생각나면 표시를 했다. 그냥 넘어간 것도 있어서 이보다 더 많지만 몇 군데 예를 들면,

가장 빈번한 실수는 인물 이름 바꿔치기. p66 :7 '앙리'를 '톰'으로,  p221 :밑에서 셋째 줄 '에릭'을 '피터'로. p232 : 4 '톰'을 '에릭'으로. p298 :밑에서 다섯째 줄 '프랭크'를 '톰'으로 p313 :5 '그'라고 해야 할 걸 '그와 프랭크'로(프랭크는 이 장면 바로 앞에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작별인사함). 이름 표기도 p146 중간 쯤에 앞에 문장은 프랑크, 뒤에 문장엔 프랭크.

'리플리의 게임' 경우도 이름 바꾸기가 많았지만 표시를 안 해 두어서 옮기기 어렵고, 지금 기억 나는 것은 '칼'이라는 운전사가 가방을 들어 주는데 '조나단의 가방은 칼이 들었다'가 되어야 할 것을 '조나단의 가방에는 칼이 들었다'로 웃지 못할 표기를 해 놨다.

리플리 시리즈에 대한 기대를 하는 하이스미스 팬들도 많을 텐데 참 어이없고 안타깝다.

번역자와 출판사 양쪽 모두가 불성실하였다고 생각한다. 두 쪽 중에 어느 쪽이라도 조금만 더 자기 일에 성실성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실수들투성이니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상황파악이 안 된다'라는 불평은 원서를 읽지 못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억울해도 증거를 댈 수 없는 하소연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위에 지적한 '그책'출판사와 옮긴이 '홍성영'씨의 정신없는 표기들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부부 사이에 왜 항상 아내만 남편에게 높임말을 쓰는 번역을 하는지?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식인? 지식인(번역자)들이 현실을 앞서 내다보기는커녕 반영도 못한다면 문제 있는 것 아닐까요. 뭐 요새는 지식인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구식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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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죄를 등에 업고 사는 인간의 이미지. 그것에 짓눌려 압사당하지 않고 삶을 열어 나가는 인간의 모습. 이 영화에서 이런 것을 보아낸 이상 뭔가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그렇지만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 같은 것은 내 관심이 아니다. 그럴 능력도 안 된다. 나는 나를 낚아채 가는 특정 이미지들에만 집중한다.

몇 개의 극장에서만 개봉한지라 언제 갈까 주저하다 결국 놓치고 디브이디를 샀고, 한 번에 연결해서 보지도 못하고 이틀에 걸쳐서 보았다.   

이 영화에 내가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은 그가 지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이 내 영혼의 가장 핵심이 된 것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그것이 내 영혼을 좀먹지 않고 내 영혼에 동참하여 확장시켜나가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인 사람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 것인가, 나는 그를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 가장 깊이 그를 두고 가장 소중한 시간에 그와 함께 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와 대화하고 웃고 그와 함께 기념하고 그에게 배운다. 나의 그에 대한 죄의식은 그와 함께 살므로써 굴레나 억압이 아니다. 죄를 기억하는 그 시간은 그에게 항상 평화롭다. 

어떻게 그는 이렇게 할 줄 알았을까?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그가 삶에서 배우며 자기 삶을 주도하는 모습, 중요한 것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불행해지는 이유는 내가 반드시 주도해야 할 일에서조차 자행된 무분별한 방치와 그 결과를 통해 배우려하지 않음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시련을 거치며 성장하였다. 그는 그가 사랑할만한 것들이 있음을 확인하였을 때 그것들을 얻으려 계획하고, 다가간다.  계획하고 한 발 한 발 그쪽으로 발을 옮기는 것을, 이 영화는 인물에 대한 미화나 과장이나 감상 없이 보여준다.

보고나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영화,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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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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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영하의 글은 다 읽었지 싶다. 생각해 보면 배수아, 김영하가 한국문학의 기대주 운운하여 선그라스에 이어링(김영하의 이어링 자욱은 다 사라지고 남을 시간이 흘렀다.)을 하고 함께 찍은 전신사진이 신문에 실릴 때부터 아니 그 이전에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할 때부터 그의 글은 항상 나의 관심권 안이었다.

당대의 대중문화 코드를 문장을 통해 삶에 대한 감수성으로 직역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으며, 새로운 매체를 수족부리듯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독자와 소통하고, 기존의 작가와 달리 몸을 사리지 않는 쾌활한 자기 표현력을 지닌, 김영하 같은 작가는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흥미로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편이 몇 권 나왔고 <퀴즈 쇼>를 조선일보에 연재할 즈음에 그는 대학교수였고 라디오진행자였고 얼핏 들리느니 무슨 영화제를 위해 짧은 영상물도 만들고 있다는 것 같았다. 하이델베르크나 동경을 찍고 만든 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즈음에 김영하는 내게 작가라기보다 문화활동가나 엔터테인먼트 비슷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퀴즈 쇼>가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읽고 나서, 나는 서운했다. 괜찮은 글쟁이를 잃은 심정이었다. 소설은 가볍고 엉성하여 분위기만 잡다가 끝나버리는 영화를 보는 듯 했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소개글을 통해 그가 주변정리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작가가 자신을 소설가로 규정짓겠다면 제대로 된 소설을 쓰기위해서 필요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소설의 자양을 발견할 또한 그것을 퍼올릴 시간도 스스로에게 주지 않으면 자기반복과 얄팍한 소재주의에 머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가 <빛의 제국>에서 썼던 인용을 다시 인용하자면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전환점에 서서 독자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편지와도 같은 글이니만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간 작가에게 가졌던 관심의 곡절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그의 오랜 독자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인 것이다. 잘 떠났습니다. 작가여, 그곳이 시칠리아든 캐나다든 한반도의 골짜기 서부전선이든 원주의 텅빈 원형극장이든.

더 멀리, 더 깊이, 더 고통스럽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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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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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것은 ‘자전적’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다. 작가 황석영의 발아기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호기심이 없이 작품만으로 만나는 현재의 청소년에게는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무슨 작품의 매력이 될 수는 없겠다.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어 가는, 또는 그 인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것이 성장 소설의 내용이라 할 때 이 작품은 너무 외연이 다채로운 반면 인물의 내면은 공감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섬세한 감정의 결이 드러나려 하면 의도적으로 창피를 주고 무시한다. 왜 책이나 시인의 이름이나 영화가 언급되는 것이 부끄러운가. ‘준’은 문예반 애들에게 말한다. ‘소중한 것일수록 조심스럽게 감추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바닥을 까보인다’고. 그렇다. 그래서야 깊이가 없겠지. 그러나 소설이 일기처럼 고백투로 각자 이야기를 돌아가며 하고 있는 구성인 판에 내면의 고민이 시적이든 낭만적이든 퇴폐적이든 부끄러우나마 좀 언급되었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왜 ‘준’에게는 바깥 세상의 밑바닥 체험만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에 반해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어째서 시치미 떼고 넘어가고 있는가. 나는 극적이고 다채로운 체험의 주인공이며 행동주의자인 황석영의 이런 부분에서의 비밀이 밝혀지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준’에게 홀어머니의 존재란 너무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 같은 부분이라 섣불리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일까.

거기에 집중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나는 성긴 느낌을 받는다. 성장 소설이란 가족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찾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이 외면되고 있다는 생각에 아쉽다.

그래서 ‘준’이 자살할 때 왜 그렇게 쉽사리 굴복하고, 가족에 대한 염려나 연민은 부족한지 어리둥절해 진다. 준의 행동은 그가 부정하던 허무주의 같은 감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짐작해야 하는지 소설 속에는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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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즈 엔드 - E. M. 포스터 전집 E. M. 포스터 전집 7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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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남들 눈에 늘 책읽기에 신경쓰는 듯 보여도 실상 꼽아보면 소위 명작이라 불리는 책 중에도 안 읽은 것이 훨씬 많아  도대체 무엇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보면 한심할 따름이다.  요즘 말로 삽질로만 시간을 탕진한다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포스터의 '하워즈 엔드'를 나처럼 소문으로 듣기만 해왔다면 일독하시기를 권한다.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으며 상징이랄 것도 없이 말하는 바가 선명하여, 뚜렷한 목적지가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즐겁기 짝이 없어 언제 도착한지 모르고 다 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 읽고 나면 읽을 때 재미있었는데 뭐 얘기하는 것인진 잘 모르겠더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의 끝에 이르면 삶을 보는 눈이 한층 깊어진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계급간의 갈등이라든가 인간은 무엇을 옹호해야하는가의 문제는 백 년 전의 영국지식인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쉽게 풀리는 문제는 아니다.  경제적인 면은 조금 여유로울지 몰라도 계급으로 치자면 우리시대의 절대다수는 작중인물 중 하급관리(레너드)의 후손이 아닐까싶다.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레너드의 후손중에서도 다시 몇 가지 부류가 있을 것이지만.  핵심에 진입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고 만다는 점에서, 교양이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다기 보다 맛보기 정도로 소비하고 끝나는 인생들이 절대 다수란 점에서.   작품속에 마거릿은 레너드를 떠올리며  '막연한 열망, 정신적 허영, 책 껍데기들과의 친숙함'으로 결국 원래 선량하였던 사람들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자기를 괴롭히게 된다는 식으로 냉정하게 진단하고 있다.  마거릿은 또한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인물인데 특히 '독립적 사고란 독립적 수입에서' , '내가 가진 돈이 나라는 섬을 이 바다 위에 떠올라 있을 수 있게 한다.'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그로인해 이 여자의 인간애, 인간에 대한 동지애와 이해심이 더 탄탄하고 설득력이 있다.  슬기롭고 용기있는 여성이다.  한 번 만나보세요.

포스터의 '전망좋은 방'과 '모리스'를 주문해 두고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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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2006-02-0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영국 소설을 보면 남성의 제한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이지적인 여주인공의 계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조지 엘리엇 소설의 주인공들이라든가)... 마거릿은 그중에서도 참 마음에 드는 슬기로운 여성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