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것은 ‘자전적’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다. 작가 황석영의 발아기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호기심이 없이 작품만으로 만나는 현재의 청소년에게는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무슨 작품의 매력이 될 수는 없겠다.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어 가는, 또는 그 인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것이 성장 소설의 내용이라 할 때 이 작품은 너무 외연이 다채로운 반면 인물의 내면은 공감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섬세한 감정의 결이 드러나려 하면 의도적으로 창피를 주고 무시한다. 왜 책이나 시인의 이름이나 영화가 언급되는 것이 부끄러운가. ‘준’은 문예반 애들에게 말한다. ‘소중한 것일수록 조심스럽게 감추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바닥을 까보인다’고. 그렇다. 그래서야 깊이가 없겠지. 그러나 소설이 일기처럼 고백투로 각자 이야기를 돌아가며 하고 있는 구성인 판에 내면의 고민이 시적이든 낭만적이든 퇴폐적이든 부끄러우나마 좀 언급되었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왜 ‘준’에게는 바깥 세상의 밑바닥 체험만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에 반해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어째서 시치미 떼고 넘어가고 있는가. 나는 극적이고 다채로운 체험의 주인공이며 행동주의자인 황석영의 이런 부분에서의 비밀이 밝혀지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준’에게 홀어머니의 존재란 너무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 같은 부분이라 섣불리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일까.

거기에 집중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나는 성긴 느낌을 받는다. 성장 소설이란 가족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찾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이 외면되고 있다는 생각에 아쉽다.

그래서 ‘준’이 자살할 때 왜 그렇게 쉽사리 굴복하고, 가족에 대한 염려나 연민은 부족한지 어리둥절해 진다. 준의 행동은 그가 부정하던 허무주의 같은 감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짐작해야 하는지 소설 속에는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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