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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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본문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남편은 아내만 아내는 남편만 존재하는 듯이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도쿄의 관공서에서 일하는 덕에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하루하루 생계가 가능합니다. 구멍난 구두도 새 코트의 필요성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부부였는데 작은집에 얹혀 살던 동생의 학비 문제가 대두되며 가진 경제력 이상의 수완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초연합니다. 주인공 소스케는 당사자 동생은 물론이고 독자가 보기에도 답답하리만치 차일피일 미루면서 현실 문제 해결에 소극적입니다. 소스케의 태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되는대로 될 것이야, 입니다. 자신이 나서서 일의 흐름을 트고 결정을 짓는 것을 하려 하지 않아요. 이런 일을 하려 하면 자신 뿐 아니라 바깥 세계 구성원들에게도 일련의 요구가 따르는데 그것을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소스케와 아내 오요네가 가진 소극성이 특이하게 보일 즈음 이웃에 사는 집 주인 사카이와의 교제가 전개되고 그러면서 이 부부의 도쿄 생활 이전 사연이 서술됩니다. 이 사연이란 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그냥 써버리자면 아내 오요네는 친구의 동거녀였는데 소스케와 서로 사랑하게(간통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다니던 학교와 집에 그 일이 다 알려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부부만 남은 것이죠. 그리고 부부는 일종의 죄의식 속에 움츠리고 서로 이외의 외부와는 단절되어 살아갑니다. 


이들에겐 희귀하달 수 있는 집 주인 사카이와의 교제는 소스케의 삶과 대비되는, 어쩌면 소스케도 그렇게 살 수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해진 삶의 형태를 보여 줍니다. 골목 끝 절벽 옆에 있는 해도 잘 안 드는 소스케의 셋집과 절벽 위에 여러 자녀들의 웃음 소리,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카이의 집. 그 집의 귀여운 딸아이들, 윤기나는 마룻바닥과 다다미, 가스난방기, 무엇보다 사카이라는 사람의 사교적이고 배려심 있는 원만한 인품은 소스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소설에서 소스케가 대놓고 이런 것을 절실해 하진 않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견주어 생각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카이네와의 인연 때문에 세월의 힘으로 어느정도 바래어 두고 견디던 과거의 사건이 눈 앞에 펼쳐질 위기가 닥쳤을 때 소스케는 고스란히 되살아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인내만으로 버티는 것은 언제든 자아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의 실제 내용이 커지는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저는 이 문장이 나오는 부분에 몰입했습니다. 마음의 실제 내용은 어떻게 커질 수 있을까. 소스케는 종교와 좌선을 떠올립니다. 종교와 좌선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산사로 갑니다. 이 시도 후에 본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지으면서도 큰일의 절반쯤은 끝난 것처럼 느낍니다. 열흘 동안의 시도이지만 그런 몸부림 자체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래와 같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하였으니까요.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중략)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저는 위에 인용한 부분이 세상의 모든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도 읽혔습니다. 

제목 '문'은 이현우 서평가의 해설을 보니 연재하기 전에 아사히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제목을 짓게 했다고 하네요. 소세키가 제목에 별 신경 안 썼고 남이 지어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하여 부부의 일상으로 끝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나쓰메 소세키의 필력에 수긍하였습니다. 세세한 사소한 일상에 귀기울이게 하는 힘, 그 밑으로 흐르는 사건을 이어서 전체를 떠받치며 마무리하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실시간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이렇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게 하고 동시에, 불시에 따귀를 때리는 듯한 문장이 튀어나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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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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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로 된 이 소설은 1, 2부가 여행지에서의 일이고 3, 4부는 도쿄 집이 배경인데 4부 뒷 부분은 여행지에서 보낸 편지로 되어 있어 여행이 큰 비중을 차지해요. 

   

1부 '친구'

여행지인 오사카에서 친구가 갑자기 발병하여 입원을 하게 되고, '나'는 그 병원에서 오래 시간을 보냅니다. 친구는 중병이 아니라 병세에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나'는 설렁설렁 이것저것 살피면서 병원의 간호사나 미모의 다른 병실 환자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친구의 정보와 주고받으며 잡담하는 중 그의 비밀스런 연애담 비슷한 것을 듣게 됩니다. 연애다운 연애는 아니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 후 이혼하고 머리가 이상해진 채 친구네 집에 잠시 머문, 지금은 죽어버린 친구 집안 지인의 딸과의 사연입니다. 

친구가 앓는 위장병과 사연 속의 아가씨가 가진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병은 소세키가 잘 아는 병이라 여러 작품에 등장하였죠. 그리고 '불행한 결혼'이라는 주제도. 

내가 아픈 것이 아님. 친구가 아픈데 심한 병은 아님. 나는 이 장소가 여행지라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고 고독한 친구를 생각해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 수 밖에 없음 - 이런 조건은 참 이상적인 것 같습니다. 멍하게 앉아서 남을 관찰하거나 창 밖 풍경을 살피면서 마음 속 생각에 잠기는 것 이외엔 할 일이 없어도 되는, 시공의 틈바구니에 위치한 화자를 내세우기에 말입니다. (이런 상황의 이런 화자라면 가장 유명한 소설이 바로 <마의 산> 아닐까요.)


2부 '형'

친구는 거의 나아져서 침대차로 도쿄로 가고 '나'는 어머니와 형 부부가 온다고 하여 남게 됩니다. 집에 살림을 돕던 친척 아가씨의 혼담 문제도 처리해야 하고, 겸사겸사 여행을 온 것이죠.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지를 다니고 가족 구성원들의 성격과 관계, 갈등이 드러나게 됩니다. 형 부부는 서로에게 냉담한데 형은 그것을 못 견디며 괴로워하는 쪽이고 형수는 더 차분해 보입니다. 둘 다 남들 앞에서 상대로 인해 본인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형의 경우 오래 겪은 부모나 형제들에게 그 심사가 다 읽히는 것이죠. 여행이 진행되며 형 부부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화자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은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게 되고...

2부에서 인문 학자인 '형'은 역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게 봐 주면 생각으로 생각을 쌓아올리는 학자적 성격, 사색의 외곬으로 인한 것이지만 제가 보기엔 집안의 장남으로 뭐든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 기준에 못 미치고 의심이 생기면 그 의심과 집착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히스테리적 성격에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원만한 사람들끼리도 여행지에선 서로에게 너무 밀착하게 되어 삐걱이기 쉽지만 2부의 이 가족의 눈치보기 말 조심하기는 살얼음 판이다 싶은 장면이 여럿 있더군요. 본격 등장하는 '불행한 결혼'


3부 '돌아오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새로이 보게 되는 형이라는 사람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물에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전에는 학자니까 자기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로 필요하겠지, 장남이니까 다들 어느정도 접고 대우하는(받는) 게 맞겠지, 하고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형과 나머지 가족 사이 서로 간의 양해가 견고한 틀로 고정되고 형은 자발적, 비자발적 고립 상태가 됩니다. 다른 가족들은 형의 서재에 들어서면 뿜어져 나오는 사색(思索)의 오라(aura) 달리 말하자면 불친절의 냉기로 오싹한 느낌까지 갖게 되어 들어가길 꺼립니다. 어느 날 '나'는 형과 격하게 부딪히는 중에 욕을 먹고, 이후 저녁 식사 때마다 지겨움과 불쾌함을 견디다 못해 방을 얻어 집을 나옵니다. 그리고 오사카 사람과 진행 중이던 친척 아가씨의 결혼식이 있고, 그리고 '나'는 형의 강의가 이상해졌다는 평을 건너건너 듣게 됩니다. 이 소설을 읽어 갈수록 형인 이치로에게서 나쓰메 소세키 본인의 반영을 보게 됩니다. 3부에서는 부부와 가족 같은 가장 가깝게 맺어진 사람을 너무나 멀게만 느끼고 다가갈 방법을 모르고 내면으로 심연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형'의 문제가 점점 부각됩니다. 


4부 '번뇌'

'나'는 형수와 부모님께 각기 전해 들은 형의 근황이 너무 걱정이 됩니다. 결국 친구가 연결해 주어 형의 절친 'H'씨를 만나고, 형과 여행을 가달라고 부탁합니다. 여행으로 심신의 전환을 바라고요. 그리고 형을 관찰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무리한 요구지만 어찌저찌 받아들여지고 초조한 기다림 끝에 편지를 받습니다. 


' H씨는 촘촘하게 줄이 쳐진 서양 종이에 만년필로 가득 써서 보내왔다. 장수만 봐도 두세 시간에 쓸 수 있는 편지가 아니었다. 나는 책상에 묶인 인형 같은 자세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조그맣고 까만 글자의 한 점 한 획도 놓치지 않으려는 결심이 불꽃처럼 빛났다. 내 마음은 편지지 위에 못 박혔다. 게다가 눈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그 위를 미끄러져 갔다. 요컨대 나는 H씨의 편지 첫 장 첫 줄부터 읽기 시작하여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편지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


이후 내용은 편지로 이어지다가 소설이 끝납니다. 58페이지 분량의 편지네요. 긴 편지가 인용된 경우가 이 소설 다음의 장편 <마음>에도 있었던(유서였고 분량은 훨씬 많았으나) 기억이 납니다. 편지라는 매체가 과거의 소설에선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죠. 이제는 역사의 한 장이 된 거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편지의 문장이 매우 좋습니다. <마음>에서도 편지 속의 문장이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H'씨의 편지에 드러난 형은 친구의 눈으로 본 형이지만 도쿄를 떠나 먹고 자고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며 가족처럼 생활을 하면서 본 모습이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의 내면이 행위와 대화로 깊고 솔직하게 드러납니다. 이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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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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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완성을 본 작가의 마지막 소설입니다. 이듬해 1916년 <명암> 연재 중에 사망했으니까요.

첫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던 즈음을 소설 속 현재 시간으로 해서 가족, 친척, 양부모와의 관계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더듬는 내용입니다. 

시간과 사건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 소설입니다. 제목을 저렇게 정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소설 업의 본격적인 목표가 아니고 길 가다 잠시 딴 짓 하는 것, 일종의 한눈팔기에 해당된다는 뜻이거나 동시에 본인의 개인사는 길가의 풀같이 흔하고 볼품없는 이야기라는 뜻이었을까요. 


주인공 겐조는 결혼 후 국비유학을 하고 돌아와 보니 처자를 의탁했던 처가는 몰락해 있습니다.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던 형네와 누나네는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더 어려워지고 건강도 나빠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겐조는 교사 일을 하며 받는 돈을 쪼개서 누나에게 매달 조금의 용돈을 주고 돈이 필요하다는 장인에게 본인 지인에게 돈을 빌려 건네기도 하는 와중에 수십 년 인연을 끊었던 양부모까지 각자 찾아와 손을 벌립니다. 온 사방에서 돈, 돈 하는 것이죠. 머리가 좋아 서양 유학까지 다녀 왔으니 마음 먹으면 자신들이 필요한 돈 정도는 쉽게 벌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감정은 혐오감입니다. 특히 이 양부모라는 사람들에 대한 겐조의 혐오감은 참 처지 곤란한 감정입니다. 세 살부터 열 살까지 자신을 키워 주었는데 그때 그들이 겐조가 어리다고 아무 포장 없이 드러낸 추한 본성에 질려 있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현재 교육자로서의 체면으로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늙고 누추해졌으나 여전히 수치를 모르는 그들을 보며 조금만 착한 인간들이었으면 내가 슬플 수 있을 것인데, 라고 생각합니다. 깡마르고 쪼그라진 형이나 천식으로 헐떡이는 누나, 허영기 가득한 매형도 자신의 과거지만 불시에 현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무언가 조잡함과 혐오스러움을 동반하며 배후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겐조 자신이 이룬 가정은 어떤가. 아내와도 관계가 원만치 않습니다. 아내가 입안의 혀처럼 굴어주면 좋겠는데 아내는 뻣뻣하고 오만하게 구는 겐조에 대한 불만을 안고 있고 대화할 이도 없어 그런지 히스테리 증상을 보입니다. 겐조의 옹졸한 성격이 현실의 갑갑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워지면 그 화가 아내에게 퍼부어질 때가 많습니다. 소설 속에 겐조가 집에서 가족들에게 얼마나 냉정하고 때로 폭력적, 폭군적으로 구는지 몇몇 문장이 있습니다만 독자인 제가 보기엔 어린 자녀 둘과 임신한 아내가 느꼈을 공포에 맞먹는 상세하고 가차 없는 묘사는 아니었어요. 나쓰메 소세키 위상으로 볼 때 당시 관점에서 보자면 스스로를 충분히 추하게 표현했다고 만족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잘 쓴 자연주의 소설로 칭송받은 작품인지도요. 제가 보기엔 관념적인 면에서 본인의 성격이나 심리를 혐오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잘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사용한 폭력의 표현에는 주저가 느껴졌어요.    

겐조는 자기 출신에서 탈출한 후에도 벗어나지지 않는 자기의 배경이 앞으로도 영영 벗어나질 수 없음을,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서 확인합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양자로 갔다가 다시 본가로 되돌아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상세한 전후 사정은 이 소설로 알게 되었어요. 현암사의 이 책에 소세키 평전과 비교하는 주가 계속 나오는데 사실과 거의 부합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에 보면 친가에는 위에 형들이 있어 겐조가 별 필요(?)가 없었고 양부모는 몸이 자라면 사환이든 뭐든 시켜서 자신들의 노후 대비를 할 심산입니다. 양부모 이혼과 재혼 등으로 다시 친가로 왔으나 아버지의 관심이나 애정은 받지 못하였고 사환 같은 것만은 안 되겠다고 되풀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살 길을 공부에서 찾은 셈입니다. 세 살부터 열 살이면 참 중요한 시기인데, 순수하지 못한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양육되고 이후에는 친가의 무정함에 자신을 물건처럼 느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20대부터 시작된 신경쇠약 증상과 중년 이후 늘 달고 살던 위염의 원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위염은 결국 위궤양이 되고 질긴 고통을 주다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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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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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부호의 아들, 뭇 사람들이 놀랄만큼의 용모. 주인공 기요아키는 이런 조건을 가진 18, 19세 무렵의 청년입니다. 요즘 같으면 청소년이고 아기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주변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중심인물이라 읽어나가다가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놀랍니다. 물론 백 년 정도 전의 귀족 가문이니 어른 대접의 기준이 달랐지만요.

주인공 기요아키가 감정대로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물불 안 가리는 청춘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성인 남성과 같은 진지함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친구 혼다는 이성적이며 무척이나 깊이 있는 사고력을 펼치는 것이 나이가 믿기지 않는 수준을 보입니다. 또한 기요아키의 연인 사토코도 갓 스물이지만 신비한 아름다움의 소유자로 풋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성숙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이들의 나이는 잊고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목 '봄눈'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봄눈은 한 겨울에 내리는 눈과는 달리 한 템포 늦게 찾아오는 눈이며 한 해가 시작되는 시기에 내려서 곧 녹을 눈입니다. 이 봄눈은 기요아키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뭔가 꿈같이 좋은 것이 여기에 있는데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시간이 어긋나 있으며 흔적을 길게 남길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아니 거꾸로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꿈같이 좋은 것이 어긋난 시간에 흔적을 길게 남길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최상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요. 기요아키는 확고하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토코와 현실 시간이 어긋난 이후 비로소 감정을 마음껏 불태우며 생사를 걸고 돌진합니다. 그것이 우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허락한 시간과 여건에 가질 수 있는 것에는 아름다움을 못 느끼고요. 끝에는 당연히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한 잦은 묘사나 추함에 대한 혐오, 우아함에의 집착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독서 중에 작가를 자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우아함의 화신인양 퍼포먼스를 통해 인생을 작품화하려고 했었던 작가.(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집니다.)

 

읽으며 주의를 끌었던 것 중 하나는 귀족계급이며 부유한 집안이라 서양의 온갖 문화적, 물질적 사치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습게도 졸부들이 그러듯이 어디 제(made in -)인지 일일이 밝혀 말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시카고에서 수입한 스팀 난방 시설을 갖춘 양관, 이태리 대리석으로 된 당구대가 놓인 당구실, 거기에 걸린 영국에서 온 화가가 그린 조부의 커다란 초상화, 스코틀랜드산 무릎 덮개 등등. 당시의 일본 최상층이 서구 문물을 흡수하며 누린 모습은 졸부가 과시성 소비를 하는 것과 비슷했을까요. 이들은 전혀 졸부가 아니지만 서양의 문화 앞에서는 그런 심리적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치하고 속물적이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좋은 것은 그냥 좋은 것이다’, ‘내 것이 되면 내 것이지라는 거리낌없는 태도가 있습니다. 애초에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어떤 거부감이나 위축감 같은 것이 없어요. 침략을 받아 강제로 이식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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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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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것은 막막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 행위의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시간의 무심함과 가차없음, 고독과 이어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드로고는 산악 지대의 고립된 국경 요새에 발령 받았다. 인생에서 기대할 아무 즐거움도 기쁨도 없어 보이는 오래된 요새의 분위기에 질려 가능한 빨리 이동하고자 마음먹는다.

넉 달 후 나가려던 것이 사 년이 지났지만 일은 꼬이고 다시 요새에 머물게 된다. 드로고의 꿈, 선의, 성실함, 선량함은 다른 상관들이나 동료들에게 아무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정해진 일과대로 국경 경비 임무를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그들의 목적에 드로고를 이용하기만 할뿐이다. 타타르인들과의 전투가 언젠가 시작될 것이라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부질없는 희망과 전투에서 활약하는 영광을 기대하며 끊임없이 전방의 사막을 주시하는 임무를 매일, 수십 개월, 수십 년 계속하고 있다.

 

시간은 믿기지 않을 만큼 빨리 지나간다. 여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리는가 의아해하다가 달력을 보면 11월 끝자락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식이다.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며 성향이 다른 동료들과는 더욱더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그나마 진심을 얘기할 수 있던 상관 오르티츠도 정년을 맞아 떠난다. 어머니는 죽고 형제들은 고향을 떠나고 그밖의 도시에서의 인연들은 잊혀지고 도시의 삶은 까마득하고 어색할 뿐이다. 드로고를 기억할 사람은 없다. 드로고의 삶은 요새에 있다. 하지만 아직도 좋은 시간이 저 앞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드로고는 더이상 계단을 두 단씩 뛰어 오르지 않게 되었음과 말타기가 귀찮아졌음을 깨닫는다. 드로고는 어느덧 늙어 있다.

 

어느 날 드로고에게 병이 찾아온다. 살이 많이 빠지고 얼굴은 누렇게 변하고 서 있으면 어지럼증을 느낀다. 조금 쉬면 나을거라고 요새의 의사는 얘기하지만 몸은 회복되지 않는다. 와병 중에 적이 드디어 침략해 내려온다. 인생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전투에 임박하여 드로고는 다른 지역에서 투입된 장교들을 위해 방을 비워 줘야 한다. 사실 드로고는 서 있기도 힘든 몸이 되어 전투에 자신의 쓸모를 끝까지 주장할 수 없었다. 자존심도 버리고 남아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기였으나 이제는 요새의 지휘관이 된 자에게 삼십 년 동안 쓰던 방에서 쫓겨나 하산하게 된다.

 

도중에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산기슭의 여관에 머문다. 부관은 식당으로 내려가고 드로고 혼자 점차 어두워지는 방에 앉아 맑고 달콤한 저녁 공기를 호흡한다. 여관의 식당에서 누군가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아름다운 저녁이다. 문득 드로고는 죽음을 대면할 시간임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다...달을 보게 될까..’

드로고에게는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하지만 죽음은 누구나 혼자 맞이한다. 이것은 일생일대의 특별한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도 보는 이 없지만 제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온힘을 내어 죽음을 잘 맞이하려 마음먹는다.

 

인간의 삶에서 모든 장식적이고 풍속적인 관계를 걷어내고 뼈대만 남긴다면 이렇지 않을까. 내일에 대한 헛된 희망과 막연한 기대로 잠자리에 들면서 뭉텅뭉텅 사라져가는 시간.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은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공포를 느낄 것이다마음에 사막이 하나 자리잡는 느낌이다. 시간의 사막. 그리고 이 소설은 그곳을 자꾸 들여다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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