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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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2009년부터 발표한 단편 소설 6편이 묶인 소설집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프랑스어 초급과정」, 「스페인 도둑」,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금성녀」- 작품들의 제목을 써놓고 보니 은희경은 제목조차도 참 잘 내놓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중주」로 등단하던 때부터 작가의 소설을 계속 읽어 오며 어떤 소설은 좀 가볍고 허술하다는 아쉬운 생각을 한 바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들은 이 정도 수준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에게 존경, 질투(왜?), 소중함의 감정을 두루 갖게 하였다. 특히 「금성녀」가 좋았다. 이 소설만 이야기해 보련다.

아름다웠던 두 자매가 이제 노파가 되었고 그 중 언니인 76세 유리가 자살하며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아들이 이민 간 후 혼자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책읽기를 좋아하며 조금은 인습에서 벗어난 노파인 마리가 언니의 장례 기간 동안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고 조카손자뻘인 두 청년과 장지로 향해 가는 과정이 또 한 축을 이룬다.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매순간이 최선을 다하려는 안달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그려지는 유리와 달리 마리에게는 자신의 삶(결혼 생활)을 평생 ‘남의 인생 바라보듯’하는 태도가 있다. 자신을 매혹시켰던 것으로 인한 일탈의 기억이 가져온 결과일까? 이 노파는 무척 냉정하고 세련되었다. 열정이나 열성이나 악착이 없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술회하는 대목을 보라. ‘그 결혼에 마리는 적당한 만큼만 성실했다. (중략) 몇 년 동안 병석을 지키며 성심껏 간호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결혼생활이 끝났을 때 느꼈던 행복에 대해서도 떳떳했다.’

정략적이며, 행복하고자 세운 계획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예사롭게 강요하는 유리라 할지라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야 마는 삶의 비의(秘意)를 어찌할 수가 없다. 통제되지 않는 삶에 유리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더욱 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리의 말대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유리를 오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 유형의 오해를 펼쳐놓는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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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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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책. 쿤데라가 카프카와 음악을 가지고 하는 문학강연. 카프카나 서양고전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어도 책읽는 즐거움과 문학을 이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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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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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을 구경하는 책은 아니고 낯선 곳에서 사는 이야기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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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4 : 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리플리 4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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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감으로 몇 자 쓴다.

밑에 리뷰를 쓰신 분들은 아무 지적을 안 하다니 놀랍다. 실수가 이렇게 많이 눈에 띄는 책은 처음인 것 같다. 먼저 읽은 지하의 리플리, 리플리의 게임도 몇 군데 있었는데 방금 읽기를 마친 '리플리 4 : 리플리를 따라간 소년'은 정도가 좀 심했다. 어이가 없어서 발견될 때 생각나면 표시를 했다. 그냥 넘어간 것도 있어서 이보다 더 많지만 몇 군데 예를 들면,

가장 빈번한 실수는 인물 이름 바꿔치기. p66 :7 '앙리'를 '톰'으로,  p221 :밑에서 셋째 줄 '에릭'을 '피터'로. p232 : 4 '톰'을 '에릭'으로. p298 :밑에서 다섯째 줄 '프랭크'를 '톰'으로 p313 :5 '그'라고 해야 할 걸 '그와 프랭크'로(프랭크는 이 장면 바로 앞에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작별인사함). 이름 표기도 p146 중간 쯤에 앞에 문장은 프랑크, 뒤에 문장엔 프랭크.

'리플리의 게임' 경우도 이름 바꾸기가 많았지만 표시를 안 해 두어서 옮기기 어렵고, 지금 기억 나는 것은 '칼'이라는 운전사가 가방을 들어 주는데 '조나단의 가방은 칼이 들었다'가 되어야 할 것을 '조나단의 가방에는 칼이 들었다'로 웃지 못할 표기를 해 놨다.

리플리 시리즈에 대한 기대를 하는 하이스미스 팬들도 많을 텐데 참 어이없고 안타깝다.

번역자와 출판사 양쪽 모두가 불성실하였다고 생각한다. 두 쪽 중에 어느 쪽이라도 조금만 더 자기 일에 성실성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실수들투성이니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상황파악이 안 된다'라는 불평은 원서를 읽지 못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억울해도 증거를 댈 수 없는 하소연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위에 지적한 '그책'출판사와 옮긴이 '홍성영'씨의 정신없는 표기들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부부 사이에 왜 항상 아내만 남편에게 높임말을 쓰는 번역을 하는지?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식인? 지식인(번역자)들이 현실을 앞서 내다보기는커녕 반영도 못한다면 문제 있는 것 아닐까요. 뭐 요새는 지식인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구식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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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죄를 등에 업고 사는 인간의 이미지. 그것에 짓눌려 압사당하지 않고 삶을 열어 나가는 인간의 모습. 이 영화에서 이런 것을 보아낸 이상 뭔가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그렇지만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 같은 것은 내 관심이 아니다. 그럴 능력도 안 된다. 나는 나를 낚아채 가는 특정 이미지들에만 집중한다.

몇 개의 극장에서만 개봉한지라 언제 갈까 주저하다 결국 놓치고 디브이디를 샀고, 한 번에 연결해서 보지도 못하고 이틀에 걸쳐서 보았다.   

이 영화에 내가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은 그가 지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이 내 영혼의 가장 핵심이 된 것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그것이 내 영혼을 좀먹지 않고 내 영혼에 동참하여 확장시켜나가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인 사람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 것인가, 나는 그를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 가장 깊이 그를 두고 가장 소중한 시간에 그와 함께 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와 대화하고 웃고 그와 함께 기념하고 그에게 배운다. 나의 그에 대한 죄의식은 그와 함께 살므로써 굴레나 억압이 아니다. 죄를 기억하는 그 시간은 그에게 항상 평화롭다. 

어떻게 그는 이렇게 할 줄 알았을까?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그가 삶에서 배우며 자기 삶을 주도하는 모습, 중요한 것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불행해지는 이유는 내가 반드시 주도해야 할 일에서조차 자행된 무분별한 방치와 그 결과를 통해 배우려하지 않음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시련을 거치며 성장하였다. 그는 그가 사랑할만한 것들이 있음을 확인하였을 때 그것들을 얻으려 계획하고, 다가간다.  계획하고 한 발 한 발 그쪽으로 발을 옮기는 것을, 이 영화는 인물에 대한 미화나 과장이나 감상 없이 보여준다.

보고나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영화,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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