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령 - W. G. 제발트 인터뷰 & 에세이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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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의 인터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작품을 소중히 쓰다듬고 있던 어떤 독자들에게 축복과 같다. 기대했던대로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그의 글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시간을 늦추며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며 멈추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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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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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은 서머싯 몸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여 자신이 오래 알고 지낸 인물들 이야기를, 짐짓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인 듯 써나간 소설입니다. 

화자가 관찰한 주요 인물은 래리, 엘리엇, 엘리엇의 조카이며 래리와 약혼했던 이사벨인데, 이들은 대립적인 가치를 지닌 두 세계를 표현합니다. 작가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의 주인공인 래리의 여정과 그의 사고 추이가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만 반대편의 세계에 있는 엘리엇도 소설 후반까지 존중을 받으며 등장합니다. 

엘리엇은 인생의 목표가 상류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사교계의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이었고 인생 초반에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상냥한 천성을 바탕으로 끈기있게 노력을 했고 결국 성공해서 뜻대로 화려하게 산 인물입니다. 이사벨은 삼촌 엘리엇과 기질이 비슷하여 비슷한 경로를 선택하여 살게 되고요. 작가 서머싯 몸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지인의 손에 자란 래리는 1차대전 참전 때 겪은 일로 삶에 대한 의문을 안게 되고 자신이 속했던 사회를 벗어나 공부와 모색의 길을 나섭니다. 

이들과 인연을 맺은 화자가 수십 년에 걸쳐 이들을 접촉하며 레리와 이사벨이 어떤 선택을 하고 인생에서 자리잡는지, 엘리엇의 경우에는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짓는지 대화하거나 관찰하거나 전해들은 것들을 적어나간 소설입니다.


화자에 의해 이 중 어떤 인물의 이상적 성향이 비현실적이라고, 또 다른 인물의 현실 우선주의가 속물적이라고 섣불리 비난되거나 절교 등으로 단죄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도 그러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독자 주변에 이 작품 속의 딱 이러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대도 변화했지만,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교류의 기회가 있다면 과연 노회한 화자처럼 얘도 이유가 있지, 쟤도 이유가 있으니 괜찮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만 인생을 보는 눈의 깊이나 여유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인지도 생각합니다. 

 

이사벨은 나서 자란 환경에 의해 형성된 '자기 계급 상식'의 틀을 벗어날 생각이 없고 그것이 때로는 현명하게 보이지만 대체로는 속물적인 상류층 여성입니다. 삼촌인 엘리엇은 임종에 임박해 상상하는 천국조차도 자신이 가는 곳이 화려한 상류 계층의 환경일 것이라고, 그곳에 '빌어먹을 평등' 따윈 없을 거라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예수의 말을 근거로요. 그 성경 구절이 누구나 환영한다는 뜻이지 계층별로 방이 나뉘어 있다는 뜻이랍니까. 저는 이들과 오래 인연을 이어가는, 엘리엇의 경우 임종까지 지키는 우정을 이어가는 작가인 화자의 속내가 의아했습니다. 엘리엇의 경우 비열한 사람이 아니며,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장점을 미리 얘기하긴 했어요. 이사벨의 경우엔...... 네, 아름답다고 하네요.

서머싯 모옴 같은 작가라면 다종다양한 인생 경험이 많아서 타인의 장점으로 단점을 덮어가며 두루 사귐을 이어갈 줄 알고 그 결과 글의 풍요로움이 얻어진 것일지도요. 그러나 일개 독자인 저는 엘리엇과 같은 인물과 오랜 사귐을 이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이 인물을 이렇게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에 의문이 듭니다.

저는 그냥 작가(화자)가 자신의 속물성을 인정하고 품은 결과가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는 우리 안의 속물성을 충분히 알고 시시때때 굴복하고 인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경계선은 있지 않을까하고요, 저는 엘리엇과 같은 가치관은 덮을 수 있는 단점 정도라고 보이진 않았습니다. 


래리의 경우 책을 다 읽고 나니 당시의 여건이 되던 미국인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돌아다니던 것과 크게 다르게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물론 유명 호텔과 관광지를 돈으로 주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가난 속에서 노동하며 공부가 목표인 진지한 방랑이었지만요. 래리가 알자스의 수도원 경험 후에 기독교에 대해 실망 섞인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을 들어 보면 신학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지 않나 싶었는데 이 부분은 이어질 동양 사상에의 경도에 균형 맞추기로 넣었을까 싶기도 했네요. 인도에서의 수행 생활을 통해 접한 신비한 체험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표현하거든요. 익숙한 것에는 평가가 박하고 낯선 것엔 더욱 진지한 모양새입니다. 한편으로는 독자인 제가 힌두교 등 인도 사상을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인물들이 옮겨 다니는 유럽의 여러 장소들이 서머싯 모옴이 실제로 지냈던 곳과 겹쳤습니다. 특히 남프랑스의 해안가 동네들이 그렇습니다. 서머싯 모옴은 니스에서 영면했다고 하네요. 제목이 왜 '면도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래리의 위태로운 여정, 인생의 위태로움을 의미하는 것인가 짐작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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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속죄의 저편
장 아메리 지음, 안미현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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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은 눈부시게 성장하여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가야 한다는 대세의 흐름 속에서 나의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도 원한에 차 있다‘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쓴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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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츠 갬빗 - 여섯 편의 추리소설
윌리엄 포크너 지음, 신혜빈 옮김 / 미행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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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나온 책으로 1932년부터 1949년까지 발표된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들, '연기, 몽크, 수면 위의 손, 내일, 화학적 실수, 나이츠 갬빗'이 발표순으로 묶여 있습니다.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문학동네)를 - '고함과 분노'(열린책들), '음향과 분노'(그 밖의 출판사) - 읽을 때는 예사롭지 않은 장애를 지닌 인물의 특성과 작가의 문체가 결합되어 매우 독특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문장에 쉼표와 대시( - )가 많이 사용됩니다. 이런 쉼표의 잦은 사용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끊어지는 인물의 어수선한 사고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그럴 듯했어요. 또 지시어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애매하게 느껴지는 점도 상황과 어울리며 적절하고 절묘하달까 그랬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민음사) - '내가 누워 죽어갈 때'(부클래식) - 역시 일가가 겪는 상식적이지 않은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구성원들 내면의 웅얼거림 같은 것이 작가의 문체와 어울렸고 묘하게 빠져드는 면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이전에 읽은 위의 두 소설에서 내용과 문체가 어울리는 포크너 소설의 맛을 보게 되었고, 내용이 갖는 특유의 막막함에 매력을 느꼈고, 호감을 가지며 작가의 이름을 머릿속에 갈무리 했지만 읽는 동안은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았고 자주 앞 부분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가며 읽는 수고가 따라야 했습니다.(이 문장 쓰고 보니 포크너 문장스럽습니다) 역자의 탓은 아니지 싶었으나 때로는 번역 탓도 하게 되고요. 작가가 어찌 썼든 안 그래도 어려운 소설, 번역의 과정에서 좀 친절한 다듬질이 필요했지 않을까 그래도 되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지시어가 뭘 가리키는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거듭되자 에라이 모르겠다, 심정으로 대충 넘어가게 될 때도 있었고요. 그 중에서도 매우 대충 읽어서 읽은 걸로 치기 어려운 소설이 '곰'(문학동네)이고요.

 

아마도 영어권 사람들은 문장에서 리듬감도 느낄 것이고 단어의 뉘앙스가 주는 분위기도 있을 거고, 술술 읽기 어렵다 해도 우리보다 이 작가의 소설들을 즐길 여지가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나이츠 갬빗'을 읽으면서는 여기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을 댁들도 추리 소설로 정말 즐겼냐고 물어 보고 싶었네요... 그러합니다. 추리 소설에서 이 작가가 그렇게도 즐겨쓰는 지시어가 뭘 지시하는지 혼동을 거듭하고 결국 이해를 못 하는 지경이 되자 읽어나가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가장 그랬던 작품이 표제작인 '나이츠 갬빗'이었고요. '그'는 앞서 서술한 이들 중에 누군가? '그것'이라니 무엇 말인가? 게다가 쉼표가 여럿 들어간 긴 문장에서 마지막에 서술어를 딱 봤을 때 이 서술어의 주인이 뭐였지? 대체 누구에 대한, 무엇을 설명하는 문장인지 길을 잃습니다.

  

포크너를 많이 좋아하시면 당연히 이 소설집도 좋으실 겁니다. 저는 이 작가의 글의 특징이 이번 소설들에선 더 난이도가 높았고 다 읽고 난 후의 보람은 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님이 확실한 것이 책 뒤에 신혜빈 옮긴이가 후기 끝에 각 소설에 대한 짧은 요약을 첨부했네요. '포크너가 설계한 미로에서 서성이는 독자가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면서요. 하지만 세부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큰 맥락의 줄거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위에 제가 번역이 좀 친절했어야 한다는 불만을 썼는데 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옮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포크너 특유의 길고 복잡한 문장과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역시나 두드러지는 소설이라, 단순히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매끄럽게, 짧은 길이로 토막 내지 않는 것을 번역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포크너의 문장은 이해를 거부하는 듯 장황하고 난해해 보여도 읽다 보면 묘하게 구어체 같은 특유의 호흡과 리듬이 있다. 번역문에서 이를 구현하는 것이 번역자로서 세운 큰 목표이자 도전이었다.' 라고요. 삼 년 동안 고생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의 후기도 드물게 첨부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워낙'까진 아니라도 좋아하는 작가이고 추리소설에 대한 기대 등이 저와 비슷한 지점이 있어 조금 옮겨 봅니다. '이 책을 담당한 나는 이 책을 안고 있던 삼 년 간 포크너를 악마라고 불렀다. (중략) 끝나지 않는 문장들, 그 안에 얽혀 있는 미로 같은 서사, 불분명한 호칭들, 쉼 없고 장엄한 거인의 호흡 같은 진행, 은연중 읽히는 수법, 필력, 잘 따라가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지만 그런 의심에는 심드렁한 작가관...(중략)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고 그래서 고유의 문체에서 오는 어려움도 다루면서 내내 기쁠 것 같았고, 또한 포크너지만 문학성을 짙게 띠기보다는 추리소설이니 약간 대중성 있게 쉽게 풀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했는데 그건 오해라는 게 작업 초기에 바로 판명되었다.' 라고요. 


결론적으로 포크너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한두 번 읽기로 안 되면 서너 번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옮긴이의 말처럼 구어체의 흐름을 타려면 반복 읽기가 필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훌륭한 독자의 자질을 요구하는 작가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단지 이해를 위해 세 번, 네 번 읽을 용의가 잘 안 생기니 문제입니다. 하지만 '소리와 분노'나 '내가 누워 죽어갈 때' 같은 소설은 언젠가 다시 읽을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음을 투덜대는 글이 된 거 같은데 이것도 리뷰란에 올려도 되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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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와 함께한 세벤 여행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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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 서로가 낯선 당나귀와 스티븐슨. 

둘은 12일 동안 산골 마을들과 숲을 지나고 개울 건너 계곡을 오르내리는 산악지대 도보여행을 동행하게 됩니다.  

'이 녀석에게는 단정하고 기품 있고 퀘이커 교도처럼 우아한 무엇인가가 있어서 즉시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라고 첫인상을 쓴 스티븐슨은 만나자마자 이 암탕나귀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모데스틴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당나귀를 길들이기 위한 사전 지식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짐꾼으로 태어났으니(그럴리가..) 그저 짐을 실으면 묵묵히 기품 있게 자기 짐을 감당하며 (자동적으로)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던 거 같습니다. 

모데스틴은 첫 비탈길에서 굼뜨기 시작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느린 움직임으로 속을 터지게 합니다. 지나가던 농부가 보더니 나뭇가지로 회초리를 만들어 건네며 다루는 말(프룻)도 한 수 가르쳐 줍니다. 이게 먹혀서 한동안 꽤 잘 걷다가 긴 언덕길에서 다시 퍼져 암만 어르고 밀며 프룻프룻 소릴 질러도 느릿느릿 느려터졌네요. 마음 아픈 회초리질을 계속 해야 겨우 전진. 이제 작가의 회초리 휘두르는 팔이 치통처럼 아파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나귀에 묶은 짐이 풀려 살림살이 일체가 다 먼지구덩이에 쏟아집니다. 울고 싶어진 작가는 대신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 가지 소유물을 버리고(애초에 달걀 거품기는 왜 가져왔을까요) 다시 짐을 싸서 나귀에 묶습니다. 이후로 한 번 더 짐은 풀리고...음 지치고 고생스러웠겠습니다. 그날 하루 묵게 된 여관에서 스티븐슨의 곤란을 알게 된 여관 주인이 몰이막대를 만들어 줍니다. 막대 끝에 짧은 핀이 달려 있어요. 이게 직방입니다. 이제 가볍게 모데스틴의 엉덩이를 찌르면 좌우도 안 보고 종종걸음으로 내뺍니다. 스티븐슨은 더이상 아픈 팔을 휘두르며 회초리질을 안 해도 됩니다. 모데스틴의 쥐색 엉덩이에 이따금 피가 한 방울씩 난들, 뭐 대수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전날 이 당나귀를 모느라 너무 고생을 한 탓에 동정심 자체가 사라진 것이에요. 


이것이 여행 이틀만에 일어난 일이고 우리의 첫인상은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것임을 또다시 배웁니다. 모데스틴과의 관계 정립이 된 이후로 이 작은 책의 재미는 급격히 떨어집니다. 작가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방문객으로 하루 머물며 수도사나 다른 방문객과 종교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여행 후반은 카미자르 전쟁이 벌어진 지역을 지나는데 아마도 스티븐슨이 이 코스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짐작을 합니다. 카미자르 전쟁은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인데 꽤 많은 분량으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한 유적지 답사의 느낌을 주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류의 탄압에 저항한 소수 종교가 이 지역에서 명맥을 잇고 있음을 사람들을 만나 확인하기도 하고요. 스티븐슨이 신교도로서 이런 점들이 자신에게 매우 의미있는 확인임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숲의 빈터에서 아름다운 별무리와 솔바람 속에 잠드는 행복감을 표현한들, 아름다운 자연 묘사를 길게 해도, 종교적인 자부심 표현에 귀를 기울이려 해 봐도 모데스틴과의 상호작용 얘기가 나오지 않는 나머지 부분들에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체 240페이지 중 앞 부분 50페이지만 위에 길게 요약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실제 책에 대한 소개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매우 용두사미의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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