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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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반 조금 넘게 읽었는데 내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를 읽으며 약간 의아스러웠다. 예측과 예감을 구분하여 자신이 시인이 되는 사정을 생각하는 글인데 예측이란 측면에서 자신의 경우 시인이 될 수 없는 성장 배경을 가졌다는 것이다. 작가가 될 수 있는 성장 환경, 문화 자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집에 책은 많았으며 아버지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알베르 카뮈라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자신을 소재로 예측과 예감을 구분해 일상의 인간이 시를 쓰며 거듭남을 이야기하고자 조금 무리한 거 아닌가 싶다. 아버지가 사상계를 읽고 카뮈를 좋아한다는 것은 굳이 예가 되어야 한다면 작가가 되기 힘든, 보다 작가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쪽일 텐데.

그래서 이 글 앞부분은 받아들이기 어색했으나 사실 이 글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뛰어난 시선을 보여 준다. 다시 태어나기로 설명하는 나 아닌 나로서의 작가. 심보선은 더 나아가 글을 쓰는 자신을 나도 아니고 라고 부른다. 나보다는 더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서 우정이나 세상과의 모든 소통도 그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희망을 갖게 한다. 특히 좋았던 부분을 조금 옮긴다.

< ‘쓰는 나는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인격적인 나를 소멸시킨다. 시를 쓰는 행위는 둘로 나뉜 나를 드러낸다. 분열이라기보다는 균열의 방식으로 그렇게 나뉜 나를 보여준다. 첫 번째 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현생으로 기억한다. 연속적이고 동일한, 그러므로 예측가능한 자아의 이력으로서의 현생 말이다. 두 번째 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전생으로 기억한다.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나는 계속해서 나 아닌 존재로 거듭난다. 따라서 과거는 수많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타자들로 가득한 전생이 되는 것이다. >

어떻게 보면 시를 쓰는 행위가 정신승리의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글을 씀으로써 나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니, 너무나 희망적이고 너무나 강력한 마법의 주문 같아서 글을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이 된다.

아직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아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남을 부러워하는 대목이 너무 많아서 슬몃 웃음이 나곤 했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백석, 프랑스의 어떤 노시인, 노래하며 기타치는 사람, 아이가 있는 작가들, 최승자 시인 등등을 부러워하는데 책을 직접 확인해 보면 더 많다. 책 제목을 부러움의 책이라 해도 될 정도로 빈번하다. 여기저기 발표한 글이라 작가의 말처럼 글의 수준이 일정치 않지만 두고 되풀이 읽고 싶은 꼭지가 여럿 있다. 나의 경우 기존 지면에서 읽지 않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나게 되어 더 즐겁다. 나는 시인의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시인의 글을 더 읽고 싶다. 그래서 시집도 주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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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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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2009년부터 발표한 단편 소설 6편이 묶인 소설집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프랑스어 초급과정」, 「스페인 도둑」,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금성녀」- 작품들의 제목을 써놓고 보니 은희경은 제목조차도 참 잘 내놓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중주」로 등단하던 때부터 작가의 소설을 계속 읽어 오며 어떤 소설은 좀 가볍고 허술하다는 아쉬운 생각을 한 바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들은 이 정도 수준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에게 존경, 질투(왜?), 소중함의 감정을 두루 갖게 하였다. 특히 「금성녀」가 좋았다. 이 소설만 이야기해 보련다.

아름다웠던 두 자매가 이제 노파가 되었고 그 중 언니인 76세 유리가 자살하며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아들이 이민 간 후 혼자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책읽기를 좋아하며 조금은 인습에서 벗어난 노파인 마리가 언니의 장례 기간 동안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고 조카손자뻘인 두 청년과 장지로 향해 가는 과정이 또 한 축을 이룬다.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매순간이 최선을 다하려는 안달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그려지는 유리와 달리 마리에게는 자신의 삶(결혼 생활)을 평생 ‘남의 인생 바라보듯’하는 태도가 있다. 자신을 매혹시켰던 것으로 인한 일탈의 기억이 가져온 결과일까? 이 노파는 무척 냉정하고 세련되었다. 열정이나 열성이나 악착이 없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술회하는 대목을 보라. ‘그 결혼에 마리는 적당한 만큼만 성실했다. (중략) 몇 년 동안 병석을 지키며 성심껏 간호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결혼생활이 끝났을 때 느꼈던 행복에 대해서도 떳떳했다.’

정략적이며, 행복하고자 세운 계획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예사롭게 강요하는 유리라 할지라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야 마는 삶의 비의(秘意)를 어찌할 수가 없다. 통제되지 않는 삶에 유리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더욱 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리의 말대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유리를 오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 유형의 오해를 펼쳐놓는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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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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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책. 쿤데라가 카프카와 음악을 가지고 하는 문학강연. 카프카나 서양고전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어도 책읽는 즐거움과 문학을 이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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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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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을 구경하는 책은 아니고 낯선 곳에서 사는 이야기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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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4 : 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리플리 4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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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감으로 몇 자 쓴다.

밑에 리뷰를 쓰신 분들은 아무 지적을 안 하다니 놀랍다. 실수가 이렇게 많이 눈에 띄는 책은 처음인 것 같다. 먼저 읽은 지하의 리플리, 리플리의 게임도 몇 군데 있었는데 방금 읽기를 마친 '리플리 4 : 리플리를 따라간 소년'은 정도가 좀 심했다. 어이가 없어서 발견될 때 생각나면 표시를 했다. 그냥 넘어간 것도 있어서 이보다 더 많지만 몇 군데 예를 들면,

가장 빈번한 실수는 인물 이름 바꿔치기. p66 :7 '앙리'를 '톰'으로,  p221 :밑에서 셋째 줄 '에릭'을 '피터'로. p232 : 4 '톰'을 '에릭'으로. p298 :밑에서 다섯째 줄 '프랭크'를 '톰'으로 p313 :5 '그'라고 해야 할 걸 '그와 프랭크'로(프랭크는 이 장면 바로 앞에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작별인사함). 이름 표기도 p146 중간 쯤에 앞에 문장은 프랑크, 뒤에 문장엔 프랭크.

'리플리의 게임' 경우도 이름 바꾸기가 많았지만 표시를 안 해 두어서 옮기기 어렵고, 지금 기억 나는 것은 '칼'이라는 운전사가 가방을 들어 주는데 '조나단의 가방은 칼이 들었다'가 되어야 할 것을 '조나단의 가방에는 칼이 들었다'로 웃지 못할 표기를 해 놨다.

리플리 시리즈에 대한 기대를 하는 하이스미스 팬들도 많을 텐데 참 어이없고 안타깝다.

번역자와 출판사 양쪽 모두가 불성실하였다고 생각한다. 두 쪽 중에 어느 쪽이라도 조금만 더 자기 일에 성실성이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실수들투성이니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상황파악이 안 된다'라는 불평은 원서를 읽지 못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억울해도 증거를 댈 수 없는 하소연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위에 지적한 '그책'출판사와 옮긴이 '홍성영'씨의 정신없는 표기들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부부 사이에 왜 항상 아내만 남편에게 높임말을 쓰는 번역을 하는지?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식인? 지식인(번역자)들이 현실을 앞서 내다보기는커녕 반영도 못한다면 문제 있는 것 아닐까요. 뭐 요새는 지식인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구식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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