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현대 그리스의 ‘문제적 인간’ 조르바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고, 내가 그 말을 들은 것은 공교롭게도 동원훈련 기간 중이었다. 그것은 담배 피고, 툴툴대고, 벌렁벌렁 아무 데고 드러눕기만도 짧은 2박 3일 일정에 책을 붙잡고 있는 인간한테 하는 말이 틀림없었으니 그저 뜨끔, 할 수밖에. 돌아온 사무실, 책상 위에 높다랗게 쌓여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아마 나는 주머니속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던가.

하지만 끝내 불꽃은 피어나지 않았으니, 다름 아닌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위태롭게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한 녀석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기왕에 덜 된 인간, 이왕이면 좀 더 책과 뒹굴어 보는 건 어떻소?”라고. 저자는 칼 폴라니, 제목은 <거대한 전환>이란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몽환적인 그림이 표지로 쓰인 탓일까? 그 말에 홀딱 넘어간 귀 얇은 짐승은 그리하여 이렇게 서툰 글을 끼적이고 있다. 인간이 되기를 잠시 포기한 채.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인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푸릇푸릇하던 스무 살 시절에 이미 “꿈이 뭐냐”던 여자아이의 물음에 “놀고먹는 거”라 답하고, “그래도 돈은 필요하지 않냐”는 말에는 “안 벌고 안 쓰면 돼”라고 말하던 내가 폴라니의 이름에 반응하게 된 것은 사회 탓이다. 일종의 반복학습. 평생가도 들을 일 없던 그 이름이 어느 순간, 레알 마드리드에 영입된 호나우도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폴라니가, 오늘 우리에게 폴라니는, 폴라니에 따르면……. 마치, 이번에야말로 우리 팀의 우승을 확실하게 견인할 ‘킬러’ 스트라이커의 이름을 말하기라도 하듯. 일개 팬에 불과한 사람으로서는 무의식중에라도 그 이름을 새겨놓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전환>을 바라보며 ‘드디어’와 ‘과연?’, 두 개의 부사를 떠올린다. 절판되어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그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그것이 정말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물론 의구심이 더 클 수밖에. FA 선언을 한 홍현우와 진필중을 어마어마한 돈으로 영입해서 말아먹었던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는 LG의 팬들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꽤나 세차게.

폴라니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가 소비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어떤 이론도 완벽할 수는 없고, ‘거대한 전환’은 ‘소소한 전환’들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폴라니 그 자신이 바로 ‘거대한 전환’일 수는 없는 것. 그의 이름이 아무리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고 해도, 진보와 보수가 함께 입 모아 소리쳐도, 단지 그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책망에 더 가깝다. 괜히 ‘과연?’이라며, 끝까지 읽지도 않고 건방을 떠는 모습이 스스로도 같잖은 모양.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름의 ‘소소한 전환’을 마음먹어 본다. 귀동냥으로만 듣던, 남들의 필터로 걸러 보고 그래서 오해했을 폴라니를 이번 기회에 찬찬히 읽어 볼 것. 그래서 ‘과연?’이 ‘과연!’으로 변하(전환 되)는 과정을 스스로 지켜볼 것. 물론 ‘과연?’이 ‘역시~’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그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우리가 바로 지금 폴라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94쪽) 같은 근사한 문장을 읽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결코 책을 팔아먹으려 하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책을 산다면 기쁘겠지만, A서점에서 산다면 더더욱 기쁘겠지만. (쿨럭) 아마 나는 인간이 되기는 그른 모양이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8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 '소소한 전환!')




동원 훈련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고 간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작년, 재작년에 들고 간 <금각사>와 <인 콜드 블러드>를 생각하면 두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남들 다 쉬러 오는 예비군 훈련, 어두컴컴한 막사 불빛 아래에서 3일 내내 책을 들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burn after reading 하려고 했다는...)

인문MD를 맡은 이후로 뿌듯한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시 나온 <자본>을 메인 프로모션 한 일이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대한 전환> 역시 메인 프로모션을 했지만, 그만큼 뿌듯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도 폴라니 폴라니 해대서 짜증이 좀 났달까? 그런 짜증이 좀 담겼다.

중간에 나온 "과연?"과 "역시"는, "아직?"과 "아직도?" 농담을 변형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모던 소년/소녀들 앞에 혜성 같이 나타난 벨 엔 세바스챤. "불길한 느낌이 든다면 가서 목사님을 만나봐"(If you're feeling sinister, go up and mee minister)라는 우아한 라임을 구사하던 그들이었지만, 너무 유행을 타버렸다. "아직 벨엔세바 안들어봤어?"와 "아직도 벨엔세바를 들어?"의 간극이 그만큼 짧았던 것. 뭐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교훈조로 흘러간 것은, 실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이 문장은 언제 봐도 멋지다. 이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는 프로이트 <꿈의 해석>의 첫 문장이 있다.

"다음에서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심리학적 기술이 존재하며, 이 방법을 적용하면 모든 꿈은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 활동에 포함시킬 수 있는 뜻 깊은 심리적 형성물로 드러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아, 나는 여전히 <거대한 전환>을 읽지 않았다. 실은, 이제야 조르바의 말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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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2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거대한 전환이 나온걸 보고, 그 이후에 같은 주제로 더 쉽고 명쾌하게 쓴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제사 이걸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고, 아직도 보관함 대기중 --;;
(그러나 왜 이 페이퍼를 읽으며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까요? ㅎ
인문md님의 능력은 탁월하고도 높아라!!)

활자유랑자 2009-12-21 13:37   좋아요 0 | URL
이쯤에서 같은 주제로 더 쉽고 명쾌하게 쓴 책을 후루룩 읊는다면 폼 나겠죠.
그러니 하지 않겠습니다... (응?)
실은 어제도 원고 하나 붙잡고 낑낑 대느라 오늘은 컨디션이 영 꽝이네요 ㅜㅜ


드팀전 2009-12-2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품목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군요. ^^ 벨앤 세바스천도 처음에 나온 음반들이 레드음반, 그린음반 등이 좋았어요... 조르바는 10년에 한번씩 읽기로 한 책이어서 내년이 되면 3번째 읽을 생각입니다...이윤기 역이 너무 지배적이라..고려원에 이어 출판사만 계속 바꾸고 있으니...흐.. 새해에는 맘 고생 덜하는 MD가 되시길..사는게 다 그렇습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2 15:12   좋아요 0 | URL
아직도 벨앤세바를 들으시나요? (웃음)
얼마전 나온 BBC SESSIONS 앨범도 좋아요. 옛 추억에 잠시...
사는 게 다 그렇다는 얘기는 슬퍼요. 고맙습니다. :)

mong 2009-12-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전환은 책 표지가 뜰때마다 묘한 감정으로 저를 괴롭히는 군요
(저걸 읽어 말어)
조르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 한권이고 벨앤세바는
어느 동생 녀석이 사줬는데 몇년만에 들어봐야겠어요
새해에는 책얘기(읽으시라는게 아니라!) 더 많이 해주세요 :)

활자유랑자 2009-12-22 15:13   좋아요 0 | URL
회오리 바람 속의 여인들 때문 아닐까요? ㅎㅎ
책 이야기라... 결국엔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할까요?

Mrs.M 2009-12-2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벨엔세바 이퓨어필링시니스터 앨범 표지. 오랜만에 봅니다. 대학시절에 참 많이 들었었는데요...

활자유랑자 2009-12-29 14:2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가서 미니스터를 만나실 시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