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는 하나의 경이다" - 천정환 교수
로쟈의 인문학 서재
이현우 지음 / 산책자 


로쟈라는 텍스트

"온다 리쿠는 한 명입니까?"  

얼마 전에 열렸던 서울국제도서전, 온다 리쿠의 간담회 자리에서 나왔던 질문이란다. 슬며시 미소짓게 되는 농담. 대답은 물론 "하하하, 그렇습니다"였다지만 그 질문이 나온 배경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게 정말 한 작가가 쏟아낼 수 있는 작품의 양인가? 라는 경탄. 우린 이미 '듀나'와 그/그녀(들)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로쟈'는 한 명입니까? 아마도 대답은 '그렇다'가 될 것이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바로 그 증거다. '로쟈와의 만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발문에서 천정환 교수는 "외양으로 드러난 것에 의하면 그는 진중하고 말수 적은 일종의 '아저씨'"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웅숭깊은 눈매를 가진 일종의 미남자"라는 부언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책날개에는 '미남자'의 사진 대신 일러스트를 사용함으로써 다소간의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천 교수의 발문은 "그는 하나의 경이驚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리라고 쉬이 상상하기 힘든 무궁무진한 앎에 대한 경탄이다. 그의 서재를 보고 있자면 온갖 텍스트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연상이 될 정도다. 하지만 물론, 그는 지식을 흡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공들여 직조한 서재를 통해 우리가 도착하게 되는 곳은 조금은 낯선 세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텍스트와, '듣도 보도 못한' 텍스트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텍스트가 종횡으로 연결된 세계다. 문학, 철학, 사회과학,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앎'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가 된다. 보르헤스의 정원을 닮은 그런 텍스트가.

어찌보면 그는 능숙하지만 장난끼 많은 배관공을 닮았다. 어떤 지식이나 사상의 흐름을 훑어 가는데 막막함을 느낄 때 그의 서재는 분명 도움이 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과 '접촉'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물론 즐거운 일이다. (점점 늘어나는 보관함의 책들을 보면, 버거운 일이기도 하다)

페이퍼에서 책으로...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래, 알라딘에 있는 그의 서재가 그런 데라는 건 알겠는데… 그럼 책은?  

솔직히 그의 '서재'가 책으로 엮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조금 놀랐다. '무한히 확장하는 도서관'을 닮은 '공간'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런 걱정. 하지만 앞에 놓인 <로쟈의 인문학 서재>은 그런 걱정들을 날려 버린다. 적절한 표지에 꽤나 공들인 편집, 적당한 볼륨감을 가진 새로운 '집'에 그의 글은 너무나도 쏙 어울리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긴 시간을 도둑처럼 그의 서재를 훔쳐 봤던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여전히 기묘한 경험이긴 하지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문학 노트, 예술 리뷰, 철학 페이퍼, 지젝 읽기, 번역 비평의 다섯 꼭지에 담긴 글들은 서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대부분 익숙한 글들일 것이다. 김훈의 문체…? 아. 텍스트의 즐거움? 지젝? 김기덕? 아, 그래… 뭐 이런 식으로. (물론 모두 새로 손을 보았고, 서재에 없는 글도 있다)  

하지만 직접 책장을 넘기며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컴퓨터 화면 위로 마우스를 스크롤하며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나처럼 그의 서재를 즐겨 찾았던 당신이라면, 그리고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이해할 테지. 잡힐 듯 잡히지 않던 화면 위의 글들이 한 손에 꼭 들어오는 기분이란! ('복습효과'도 있다…) 

여기 실린 글들이 '로쟈의 저공비행'의 고갱이는 아니다.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글, 너무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글'이 수록기준이라고. 그렇다면 삼겹살 정도에 비유하면 어떨까? 하여 아직 로쟈를 모르는 당신이라도, 인문학이 낯선 당신이라도 걱정할 것 없다. 자고로 삼겹살이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부위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로쟈의 글에는 '따듯함'이 있다. 그것은 때론 무의미하고 구질구질한 일상에 대한 긍정이다. "매일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살아가리라는 다짐 같은 것. (생각해보면, 그런 다짐 없이 어찌 그런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대중지성이 어떻니, 국내학문풍토가 어떻니 할 처지는 전혀 아니므로 다만 이렇게 말해야겠다. 좋은 책을 팔게 해줘서 고맙다고. 사실 알라딘의 블로거이고, 알라딘의 MD라는, 별것 아닌 인연일지 모르지만. 결국 세상 자체가 보르헤스의 정원이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 책 어디에도 '알라딘'이란 말이 없어서 별 하나 빼요. (아, 별 다는 게 아니었지…)
   

 책속에서

젊은 날, "나이가 좀 어리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늙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집어 넣어준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바닷물 속에 비스듬히 쏟아버린 후로는 늘 멍청해서 거리를 걸어 다닌다"(이제하)는 문구를 모토처럼 되뇌고 다녔다. 그때 나는 30세 이후의 삶이란 왠지 부도덕하다고 여겼고(이반 카라마조프도 그런 생각을 한다), 따라서 30세 이후의 '여생'에 딱히 무얼 해보리란 계획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때 나는 다만 멍청했던 것이고, 아무런 믿는 구석이 없다는 것이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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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9-05-2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애정이 담뿍 담긴 글이네요. 잘 봤스빈다~ ㅎ

활자유랑자 2009-05-22 13:06   좋아요 0 | URL
훔쳐보다 정들었다.. 이런 걸까요? ㅎㅎ

로쟈 2009-05-21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덕분에 즐찾이 여섯 명 늘었습니다!). 저도 읽고 싶어지는데요.^^; '알라딘'은 '로쟈의 독서문답'에 나옵니다.^^

활자유랑자 2009-05-22 13:13   좋아요 0 | URL
'늘 멍청해서 거리를 쏘다니고 있다' 보니 그걸 미처 못봤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루체오페르 2009-05-2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D님 재밌네요.ㅎㅎ
저도 팬이 될듯 합니다.^^

활자유랑자 2009-05-22 13:14   좋아요 0 | URL
혹시 로쟈 님 서재에 늘어난 즐찾 여섯 분 중에 1人 이신가요? :)

gkfk333 2009-07-17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글을 읽으면서 자꾸 속도감이 붙어요ㅎ
그런데 쉽게 읽히지는 않는 단어들을 구사하신달까ㅋㅋ
아무래도 제 어휘력이 딸리는 거겠죠?^^
암튼 이것저것 보면서 읽고 싶은 책이 점점 많아지네요^^
종종 들를께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활자유랑자 2009-07-20 13:1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무덥고 습한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