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범우 사르비아 총서 101
김구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10만원권 새 지폐의 초상을 누구로 할 것이냐에 관심이 뜨겁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그거야 물어볼 것도 뭐도 없이 당연 김구 선생 아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도 압도적으로 김구 선생인 듯했다. 지폐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만약 김구 선생이 아니라면 김구 선생 선호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그나저나, 김구 선생 이분은 박사도 뭐도 아니고 다만 '선생'일 뿐인데 사람들은 왜 이리 오래도록 존경하는 것일까. '선생님' 소리도 못 들으면서 그냥 다들 '김구 선생'이라고만 칭하면서 존경들은 왜 그리 해대 쌌는지.(웃음)

애석하게 가시긴 했어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일 뿐인데 다른 분들은 다 과거의 인물로, 역사 속 인물로 존경할 뿐인데. 어째 김구 선생만은 우리 곁에 늘 살아있으면서 우리의 정신을 다독여 주는 기분이 든다.

정치인들도 '뻑'하면 김구 선생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네. 칼럼을 쓰는 사람들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김구선생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다. 선생은 어찌 그 먹고살기 어렵고 나라도 빼앗겼던 시절에 부강한 나라가 아닌 '문화'가 우월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지 하면서 감탄할 때면 좀 고만들 우려먹으시지 하며 다소 식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랬는데 <백범일지>(범우사)를 읽고 보니 선생의 말씀은 유통기한이 따로 없고 세세 연연 우려먹어도 세대차이가 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서 대신 쓴 고백록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를 일러 유서 대용으로 쓴 글이라 하였다. 어려운 망명정부를 이끌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이 암담한 상해시절, 고국의 두 아들에게 '아비의 삶'을 들려주고자 상권을 썼다. 그리고 하권은 임시정부에 도움을 많이 준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동포들에게 '민족 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밝힘과 아울러 자신의 과오를 되밟지 말기를 바라는 노파심에서 쓴 글이었다.

아무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유년시절의 선생은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개구쟁이였다. 강물에 물감을 풀어서 노는가 하면 떡 사먹는다며 부모님 몰래 돈들 들고 장터를 가다 혼쭐이 나기도 하였다. 청년 시절엔 동학의 평등주의에 매료되어 동학교도가 되었다. 동학교도가 되어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기를 소망하였고 자연스레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본군의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울분으로 '쓰치다' 중위를 찌른 후 인천 감옥에 갇혔을 때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 크게 호령하며 그 정당성을 주장했기에 선생은 영락없는 사형감이었다. 그러나 감옥 밖 백성들은 날이면 날마다 사식을 넣어주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고 '김주경'이라는 부호는 가산을 탕진하며 선생이 사형을 면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런저런 노력 덕에 선생은 사형 직전에 극적으로 그것을 면했고 잡범들과 함께 기약 없는 옥살이를 하였다.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감옥에 든 죄수들이 열에 아홉은 까막눈임에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한 곳이 감옥인지라 먼저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죄수 중 몇몇이 '선생님 글만 가르쳐 주지 마시고 탈옥(?)도 좀 시켜 달라'는 말에 '뭐 탈옥?'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왜놈의 감옥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여 감옥을 나가면 새사람이 되겠다는 죄수 4명과 함께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고 탈옥은 성공하였다.

탈옥은 성공하였지만 바로 해주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동학하면서 만난 벗 등 아는 이들의 집을 찾아 혹은 무작정 인연이 닿는 대로 삼천리를 방랑하였다. 그런 와중 공주 마곡사에서는 중이 되고자 머리를 깎기도 하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무전여행'일진대 선생은 어딜 가나 환영받았다.

한편,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를 세우고,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신민회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독립된 나라의 감옥 상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면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게 만들 것을 생각하였다.

3.1운동 후,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여 경무국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최고수반인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 시절의 얘기에는 독립운동을 선두 지휘하면서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고뇌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그 자체로 재미이자 감동이었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 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본문 261쪽

레닌의 말 한마디에 이랬다저랬다 하는 청년들에게 고하는 선생의 올곧고 편견 없는 위의 일침은 시원 청량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상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도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옛날의 청년들이 레닌에 경도되었다면 오늘날의 글깨나 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서구사상에 함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교육'이 서야...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로 보아도 그러하다."- 본문 311쪽

이 책의 마지막에 부연된 '정치이념'이라는 그의 정치와 교육에 대한 사유는 명쾌하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교육이 서야한다는 그의 교육철학은 오늘날의 우리 교육에 절실히 필요한 명제다. 교육이 생활의 기술로, 수단으로 전락한 오늘날 우리 교육의 실태를 선생이 하늘에서 보신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아무튼, <백범일지>를 읽고 보니 김구 선생 같은 '서민' 출신이 일찍이 대한민국의 대표가 된 전례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신선했다. 그리고 나도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 그 첫 번째로 김구선생을 꼽을 것이다. 선생의 시대를 앞지르는 혜안과 이상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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