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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생육기
심복 / 을유문화사 / 1992년 1월
평점 :
절판
심복의 아내 운(芸)이의 한자 芸은, ‘성한 모양, 많은 모양’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 그런지 운이는 재주가 많은 여자였고, 무성할 정도로 풍족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운이의 타고난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계발시켜준 것이 심복이 아니었나 싶다. 심복은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했다. 자유로운 사랑이라고 하면, 으레 무슨 규범이나 예절에서 한참 벗어나 종횡무진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요즘 사람들에 비해, 이들 사랑이 보여주는 자유로움은 담백하고 정갈해보인다. 즉 상대를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상대의 특성을 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아쉬운 점도 남는다. 그들의 사랑이 운이의 불운한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심복의 가슴에는 한스러움이 남았다. 물론 죽음이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점만을 강조한다면 이들의 사랑은 애절한 로맨스로 볼 수도 있을 터이지만,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슬픔이 너무 크다면 그것은 지나친 사랑(아마도 집착)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즉 상대에 대한 자신의 소유욕이 커져 상대와의 헤어짐을 어떤 깊은 상실감,허탈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거라는 거다. 헤어짐 뒤에 남는 여운은 남은 자의 삶에 향기를 더해주어야 할 터인데, 남은 자의 삶에 향기보다는 상처만 깊이 더해준다는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둘 사이안에서만 머물렀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본다. 어찌 보면 만남 자체가 다 인연이기에, 그 형상 너머로 내게 던져주는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되새길 때, 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으로 삭혀질 거라 본다. 운이와 심복의 사랑은 그러지 못한 채 오로지 '마주보며 사랑하기'의 모습으로 남아서, 내게 아쉬움을 주는 사랑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