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고 가정이 생기고, 자식이 생기면서 문득, `죽음은 내게 어떤 순간으로 다가올까?`를 염려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내 사랑하는 이와 한순간, 지극히 찰나적인 순간,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미칠 때면 두렵기까지 하다.
살면서 경계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는데, 죽음만큼 이것과 저것을 확연히 가르는 것이 있는가. 사랑하던 이와의 이별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는 아침도,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그 간극도, 결코 확연하지 않았다. 물론, 불가에서는 죽음을 인연설로 설명한다만,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현상에 많은 것을 걸 수밖에 없는 평범한 나로서는 공감은 하나 이해는 되지 않는다.
한 평범한 가장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그날로 그의 서른 중반의 시집가지 않은 막내딸이 카메라를 집어든다. 그로부터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까지 아버지의 일상을 담기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이의 일상이라... 너무나 지극한 일상이어서, 너무나 지극하게 덤덤한 일상이어서 나는 꽤 놀랐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앞서는 나로서는, `손녀랑 잘 놀아주기`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의 앞자리에 두는 그이의 용기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운명 직전에 손녀에게 더 함께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장면에서는 `살아간다는 것`의 소박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아내에게는 더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한다. 살아계시는 아흔의 노모에게는, 제가 먼저 가게 돼서 죄송합니다.
죽음의 준비 과정을 무척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주인공이었다. 본인이 장례식에 초청할 사람의 명단을 준비하고, 소란스럽지 않은 장례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그 바람대로 장례식장을 스스로 준비하고 사전답사를 마치는 과정이 뭐 큰 결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냥 살아가는 나날의 일상 가운데 하루쯤으로 여겨졌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된다. 나의 죽음은 어떤 순간일까? 나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까? 누군가는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뜻은 뭘까? 죽음은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담담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럴 수 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