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좋은 엄마의 필독서
문은희 지음 / 예담Friend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21개월이 된 남자 아이 하나를 둔 아빠다. 아내는 2년 동안 육아에 전념하고 있고, 내년 3월이면 아내와 나의 역할 교대가 있다. 내가 육아 휴직을 하는 거다. 며칠 전엔 우리 나라 남자 육아 휴직자가 1,000명이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 수의 대다수가 공무원이거나 공기업의 직원일 것이다. 나 역시 별 어려움없이 육아 휴직을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직업이 갖고 있는 엄청난 메리트 덕임을 잘 안다. 이런 나를 두고 부러워하는 여성 직장 동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부러워하는지 잘 안다. 그래서 다른 직종에서도 남편들이 육아 휴직하는 걸 눈치보지 않고, 제도적으로 완벽히 보호받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고, 그런 걸 완전히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육아 휴직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육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집에 육아 관련 서적이 많지만, 왠지 내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나는 내가 선택한 도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몸으로 놀아주기만 하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만으로 육아를 선택한 거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육아 휴직에 관한 걱정이 늘기 시작했다. 육아는 단순히 아기를 기르는 행위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와 정서의 호응을 생각한다면, 육아를 하겠다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나 육아 태도가 무척 중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껏 아내가 해왔던 것만큼의 육아 태도를 내가 견지할 수 있을지, 아기-우리 아기 이름은 슬뫼이다.-에게 오히려 혼란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지, 염려했다.

 

우연히 한겨레 21 잡지를 넘기다가 하단에 자그맣게 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이 책과 관련한 기사였다. `오호~ 기대가 되는 걸`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고, 곧바로 주문에 들어갔다.(나는 대체로 책을 추천하는 사람이나 언론을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언론사에서 추천한 책에 대한 신뢰가 좀 높은 편이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잦다.) 책을 구입하면서 `그봐, 육아에는 엄마의 책임이 그만큼 큰 거야. 그러니까 당신, 잘 해!!`이런 말을 아내에게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곧바로 아내에게 읽으라고 들이밀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이 책은 나의 수중에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육아의 책임이 전적으로 `엄마`에게만 있다고 읽지는 않았다.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고 했지만, 실은 엄마 아빠의 잘못된 육아 태도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표현으로는 `엄마`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육아 주체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읽혔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의 `엄마`는 아기의 육아 주체, 엄마와 아빠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포함단위나, 공감능력, 어릴 적의 상처 등은 `엄마`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이 책의 저자는 박사 과정을 영국에서 밟았는데, 박사 학위 논문에 `포함 단위`라는 개념이 있었단다. 하지만 논문 지도 교수는 그것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나라 어머니들은 자식이나 남편을 모두 스스로에게 귀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된다거나, 자식의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 등이다. 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서방 세계에서는 이런 우리의 인식의 경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우리는 집단주의, 가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민족이 아닌가.

그런데, 육아에서는 이런 포함 단위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모의 실패를 자식의 성공으로 보장받으려는 것도 이런 포함 개념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교육이나 선행 학습 등의 성행도 자식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을 가장한 부모 스스로의 자족적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왜? 자식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니까.

여기서 내가 좀 의아했던 것은 포함 단위의 개념이 우리 나라의 어머니들에게만 내면화되어 있다는 걸까? 하는 거였다. 당장 나만 봐도, 나는 나의 어머니를 포함하고 있다. 나의 행복이 곧 어머니의 행복이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가 나를 포함했듯, 나 역시 나의 어머니를 포함하고 있는 거다. 이게 독립된 나로서의 삶에 때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 벗어날 수 없다. 그저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한다는 것일 뿐. 여기에는 다분히 문화적 기제들이 작용하고 있다. 내가 자라온 환경의 가부장적 태도들, 나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노력들. 이런 세례를 받고 성장한 나 역시, 아들 슬뫼에게 어떤 포함의 그물을 던져 놓을지 알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포함 단위의 위험성을 자각했으니,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이 포함단위의 문제가 거의 생래적인 것에 가까워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수양이 필요한 거겠지.)

 

아직 슬뫼는 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엄마, 이거 이거` 정도가 뚜렷하다. 그래도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눈치다. 내가 하는 말은 슬뫼가 잘 알아듣는데, 슬뫼가 하는 말은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대화의 형식은 성립하는 것인데, 소통이 이뤄지지 않으면 좀 문제가 될 것 같다.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데, 자신의 말을 상대가 알아주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아기와 부모의 공감 능력이 무척 중요한 거다. 내용은 뚜렷이 잘 몰라도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공감아닌가. 아기는 내용의 전달이나 이해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 상태 등을 공감받으면 대체로 안전함을 느낀다. 그런데 부모의 공감 능력이 단시간에 생겨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을 공감하는 능력이 과연 있나? 리더쉽 연수나 아빠 연수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내면화의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사실, 그게 어디 배움으로 해결될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를 꼽으라면, 나는 부모의 육아 태도라고 말할 것이고, 육아 태도를 결정짓는 핵심 기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부모의 어릴 적 경험이라고 말할 것 같다. 사실 육아 태도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를 맺는 법, 화를 내는 법, 대화를 하는 법 등,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삶의 태도 중 많은 부분들이 나의 어릴 적 경험과 상처에서 비롯한 게 많겠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보라고 권하고 있다. 자신의 상처가 해소되어야 건강한 육아가 가능하다는 말씀인데, 전적으로 공감이 됐다. 사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아픔과 상처를 떠올리며 그 상황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진실한 태도가 요구된다. 어떻게 나의 불우한 과거를 남한테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저자는 그렇게 하는 용기가 자녀의 육아에 무척 중요한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아내가 생각났다. 가끔 아내는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에 대해 나에게 말해줄 때가 있다. 남편인 나에게도 그런 아픔을 드러낸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은 일 같은데, 아내는 참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아내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굉장히 큰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행복한 삶을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것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내가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요가나 정토회 법회, 명상의 힘이 큰 것 같다.

나는 대체로 아내에게 어릴 적 시골에서의 따뜻한 기억들 중심으로 이야길 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무수히 많은 상처가 있었을 텐데, 그게 아직 나에게 확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갑갑증 같은 걸 느낄 때가 많은 걸 보면, 나 역시 해소되지 못한 어떤 커다란 아픔이 있겠다는 느낌 같은 것은 있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그 상처가 오죽하겠는가. 어릴 때 `젊잖다`(젊지 않다는 말의 준말이다.)는 말을 자주 들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겠는가. 며칠이 지나면 명상 기간에 들어간다. 그 기간만큼은 나의 어릴 적 아픔과 상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면서 나의 주변 사람을 위한 것일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읽었다. 부모 모두 포함 개념을 이해하고 자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 하며, 부모 모두 아기와 공감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하며, 부모 모두 스스로의 상처를 돌아볼 줄 알고 그것을 치유하며 육아에 임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어찌 육아가 부모의 일로만 묶일 수 있는가. 부모가 건강한 육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제반 여건들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남편의 육아 휴직을 교묘하게 막아서고 있는 사회적 풍토, 공동 육아 시설의 열악함,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주택의 문제, 육아가 오롯이 엄마의 몫이라고 여기는 가부장적 문화 등.

 

결국,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육아를 불가능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미개함이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지 반성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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