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봉으로 오르는 길.
지리산에는 바람과 눈만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은 갇히지 않았다.
저 멀리 남해 바다가 보인다.
제석봉 표시판.
몇 년전에 찍은 모습은 아래와 같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글로 남긴 적이 있었다.
장터목에서 제석봉 오르는 길에 표지판이 눈을 맞고 서있다.
이걸 보고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삶에 있어서도
이쪽으로 가면 몇 킬로미터 남았다.
저쪽으로 가면 몇 킬로미터 남았고,
종착지는 어디다.
이렇게 알려주는 표시판 하나쯤 있었으면...
이제는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의 내 삶은 저때보다 나아졌다는 징표인가.
눈꽃을 피워 올린 나무는 든든한 하늘을 배경삼아 섰다.
힘든 길이었지만, 아직 우리는 건재했다.
제석봉에서 천왕봉을 향해 오르는 길.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은 내 무릎보다 높게 눈이 쌓였다.
겨울 바람을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껴입고 가리고 덮어 썼다.
저 머~~얼리 반야봉이 조그맣게 보인다.
겨울 지리산, 나무는 이랬다.
이 과정을 다 거쳐 우리는, 천왕봉에 섰다.
여기서 우리는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했다.
그 길이 그렇게 가파를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이 길로만 여러번 오르셨다는 우리 학교 선생님도 계신데,
정말 몇 번이나 숨이 넘어가야 하는 길 같았다.
이번 산행길에 만난 몇 사람이 있다. 서울에서 혼자 내려온 총각, 거창 아가씨, 별 준비없이 종주길에 나선 세 청년.
서울에서 혼자 내려온 총각은 우리에게 말했다.
이렇게 고생해서 한 번 종주하고 나면 삶에 힘이 생긴다고,
그리고 한 달만 지나도 이 고생스런 지리산 종주가 다시금 하고 싶어진다고.
그래, 나도 그 말에 쉽게 공감한다.
아니, 나는 벌써 다시 지리산 종주에 나서고 싶어진다.
과연, 지리산은 이게 지리산이다.
이번 산행의 모토는 `한 바탕 울 만한 자리`였다.
외롭고 스산했던 나의 2011년을 눈물로 흘려보내겠다, 잊겠다...
그런데, 나는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천왕봉에 올라 빙 주위를 돌아 산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그야말로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 아닌가.
거기다
아버지가
어른거렸다.
아, 또 이렇게 불쑥 나를 찾아오셨다.
아버지도 이 깊은 풍경을 보고 계시군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다.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를 뵐 수 있어서 행복한 산행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제 2011년은 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