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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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을 읽은 지 제법 흘렀지만, 마음의 울림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될 때 온전할텐데, 아무래도 나의 언어로는 불가하다. 괜히 내 말을 보탰다가는 이 아름다움에 불경스런 일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이 자꾸만 울컥거려 좀체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좀 가라앉을 필요가 있었다. 책을 읽고 리뷰 몇 줄 남기는 게 훌륭한 책을 세상에 내보인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잡았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 자이니치이다. 그의 두 형은 서승, 서준식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고, 서경식은 그런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안고 우울한 시절을 버텨낸다.(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읽는 내내, 나는 그 우울감이 무거웠다.) 어쩌면 그의 우울은 태생적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아니어서, 한국에서는 재일조선인이어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생래적(生來的) 우울감!

 

 서경식의 이 책은 음악의 계급성, 잘츠부르크 음악제, 윤이상, 말러의 키워드로 읽혔다.


 음악의 계급성 - 음악은 불가사의한 존재다


 서경식은 어렸을 때, 클래식 음악에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標識)고 교양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란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런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43쪽


 음악(예술)은 다분히 계급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오페라의 시작이 르네상스 말기(1597년) 피렌체로 모여든 귀족들에게서 시작되었다지 않는가. 우리의 경우도, 궁중음악에서부터 민요까지만 해도 향유 계급은 천차만별이었다. 서양의 경우 지금도 그런가는 잘 모르지만, 지금 우리 나라에 수용되어 향유되는 클래식 음악만 봐도 그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브람스에서부터 트로트까지. 국립극장에서부터 라디오 감상까지.


  그런데 서경식은 클래식과 자본주의 중산계급의 세계를 등식으로 묶던 공식을 해제한다. 계기는 아마추어 합주단의 단골 구경꾼이 되면서다. 노동자, 교사, 두부가게 주인 등이 연주하는 음악이 전문가가 담지 못하는 진심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음악은 불가사의한 존재다.`라고 말한다.


 모차르트는 궁정과 귀족의 비호를 받았기에 수많은 명작을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 곡들은 귀족사회의 가치관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음악은 어쩐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 69쪽


잘츠부르크 음악제 - 보수의 반격


 서경식은 이 책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 덕에 음악제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새로웠다. 여기서 알게 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대한 내용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잘츠부르크음악제는 1차 세계대전 뒤 전쟁으로 황폐해진 예술의 재건과 진흥, 평화와 우애의 메시지 발신, 그리고 생활이 곤궁한 음악가와 예술가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중략) 나찌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전부터 음악제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병합이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자 또스까니니와 발터 등이 음악제를 떠났다. (중략) 전쟁이 끝난 직후 잘츠부르크는 미군이 점령했으나 음악제는 열렸다. 전쟁 전의 음악제에서 중심적인 존재였던 푸르트벵글러와 그의 숙적 카라얀은 모두 비(非)나찌화 심사를 받게 되고 음악제에 금방 복귀할 순 없었다. (중략) 푸르트벵글러는 1947년에야 복귀했으나 (중략)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 사후 1956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음악제 예술감독으로 취임했고 1960년에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잘츠부르크음악제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중략) 이 시절에 유럽 각지의 부유층들이 모여든 호화로운 사교장이 됐고, 입장료도 비싸 음악제의 재정은 아주 윤택했다. (중략) 1989년 카라얀의 급사로 잘츠부르크음악제의 카라얀시대엔 종지부가 찍혔다. (중략) 1992년에 벨기에인 제라르 모르띠에가 예술감독에 취임해 개혁을 시작했다. 모르띠에는 음악제를 호화로운 사교장에서 진지한 예술적 투쟁의 장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중략) 예술제는 실로 정치와 예술이 상극(相剋)하는 장이고, 예술에서 정치적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101쪽-103쪽)


 이런 흐름으로 변모했던 음악제에서, 저자는 `보수파의 반격`을 현장에서 목격한다. 2010년 리까르도 무띠가 지휘하는 빈 필의 공연을 마치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관객들 앞에 섰다. 그는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신세대 연출가와 연주자들의 경향에 맞서 전통적인 오페라를 수호하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다. 이것을 목격한 저자는 `관객 동원력을 다소 희생하고라도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기획을 실현하면서 현대음악에도 활동의 장을 제공해온 모르띠에의 이념에, 관객 동원력을 중시하는 상업주의가 승리했음을 의미한다.`고 평했다. 이 무렵부터 음악제의 관객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공연은 고급화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보수파의 반격에 불길함을 느꼈다. 소련이 망한 것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국수주의, 그러니까 보수화의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망선고를 받았고, 현실은 권위주의적 권력자가 통치하는 초국가일 뿐이었다. 저자가 무띠가 앞장선 음악제의 보수화에 불길함을 느끼는 것은 소련의 패망에서 느낀 어떤 회한과 관련있을 것 같다.


분열된 존재 - 윤이상, 말러, 그리고 서경식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납치, 수인이 되는 정치적 수난의 삶을 살게 된다. 그의 예술적 투쟁이 정치적 투쟁과 무관하지 않음은 그런 수난과 무관하지가 않다. 그는 독재 정권과의 격투를 그의 예술적 영감과 원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자는 형들의 구원 활동을 벌이면서 윤이상 선생과 연을 맺는다.

 우리 정부는 1980년대 이후 그의 귀국을 권유했으나, 윤이상은 `동베를린 사건`에 대한 사죄와, 국가보안법 폐지, 정치범 석방 등을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1994년 9월 그의 고향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제`가 기획되었다. 하지만 정부와 윤이상의 정치적 격투가 끝나지 않아 그의 고향 방문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고, 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한국 정부로부터 끝내 포용되지 못한 존재, 가까운 일본에서는 직접 음악제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보다 가까운 한국에서는 입국조차 허가되지 않았던 존재였다. 그 속에서 느꼈을 소외와 외로움은 예술적인 바탕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인간 윤이상에게는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짙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찬 음악가 말러 역시 분열된 존재다. 나찌시절, `유대인 3M`으로 불린 마이어베어, 멘델스존, 말러는 연주를 금지당했다. 대신, 바그너와 브루크너가 게르만 정신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권장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러는 유대교도로서의 종교적 의식은 희박했고, 범게르만주의에 동화되어갔다. 학창시절 범게르만주의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말러는 평생 자신의 출신 때문에 반유대주의로부터 위협받고 배척당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게는 삼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어서, 독일인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어서, 지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이어서. - 257쪽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경식 역시,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붙잡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존재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런 그가 서양 음악 순례를 하면서 그와 비슷한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윤이상, 말러에 집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음악을 순례했지만, 어쩌면 자기 존재에 대한 순례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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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2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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