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문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요지서였을 것이다.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문에서의 치밀한 논리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도 했다.  

드물지만 아름다운 판결문, 감동적인 판결문을 본 적도 있다. 물론 대다수의 변론문, 판결문은 아주 건조하고 거의 자기파괴에 가까운 문장이지만... 

아래 글을 읽으며 판결문 쓰기가 아니라 판결문을 쓰는 자세에서는 꽤나 배울 점이 많다.  

--------------------

나는 어떻게 쓰는가①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정인진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판결은 법관이 가지는 유일한 언어다. 법관은 사법권이라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판결이라는 기호체계만을 부여받은 셈이다. 법관의 글쓰기가 가지는 성격은 문자행위를 권력의 행사방식으로 삼는다는 이 기이함으로 규정된다.



    시사만화에서는 종종 법관을 머리에 문양이 그려진 모자를 쓰고 법대 뒤에 앉아 방망이를 내리치는 사람으로 그린다. 그러나 법관에게는 그런 모자도 없고 방망이도 없다. 법정에 앉아 있기도 하나, 그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뿐이다. 만화에서의 이미지와는 다소 동떨어지지만, 법관은 기본적으로 사무실에 앉아 판결을 쓰는 사람이다. 법관은 ‘판결 써야 하는데’ 왜 회의를 이렇게 오래 하느냐고 동료에게 투덜대고, ‘판결 쓸’ 시간도 없는데 무슨 여행이냐고 아내를 나무라고, ‘판결 쓰다가’ 다 보내버린 세월이 억울하다며 친구에게 하소연한다. ‘판결은 잘 쓰지만’ 인간성이 틀려먹었다고 욕을 먹는 법관이 있는가 하면, 사람은 좋은데 ‘판결이 좀 시원치 않은’ 법관도 있다. 법관에게 판결은 그의 직업적 모습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된다.

판결문 보면 법관 ‘견적’ 한 눈에…서울고법은 ‘서울고생법원’

    법관 생활은 3인 합의부의 배석판사로서 부장판사를 만나 판결을 쓰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장판사는 배석판사를 판결로 지도한다. 새로 짜인 재판부에서 처음 만난 배석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공부를 했는지, 제대로 된 법관 경력을 쌓아왔는지는, 그가 맨 처음 써 내는 판결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경력 높은 법관들이 다소 과장을 섞어 말하기로는, 가장 쓰기 쉽다는 자백간주 판결(피고가 원고의 주장을 다투지 않아 원고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리는 판결) 하나만 읽어 보아도 판사의 실력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새로 짜인 재판부에서 만나게 된 부장판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배석판사가 써 낸 판결의 초안이 돌아올 때 그 모습이 어떤지를 보면 바로 안다. 전혀 손을 안 대는지 아니면 손을 대는지, 손을 댄다면 꼭 필요한 곳만 고치는지 아니면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만드느라고 난도질을 해 놓는지―이런 것을 보면 부장판사와 보낼 앞날의 윤곽이 잡힌다. 
 
    법관의 일과는 법정에 나가는 것을 빼고 나면 대부분 기록을 보고, 판결문을 작성하고, 작성된 판결문을 검토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법관은 주중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일을 하고, 매일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거나 퇴근하더라도 집에서 일을 하는데, 그 일의 내용이란 판결문 작성이거나 기록 검토다. 법관 재직중에 나는 소속법원의 판사들 전원에게 보자기를 나누어 주는 법원장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보자기는 기록을 싸 가지고 가서 집에서도 일을 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었다. 그래서 법관 생활은 ‘보따리 장사’다.

    법관들은 과중하다 못해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린다. 이 과중한 업무량은 법관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천형이다. 법관의 경력 중에서도 가장 고생스러운 때는 고등법원의 배석판사 노릇을 할 때인데, 대부분의 고등법원 판사들은 고등법원 재직기간 중 한 번이나 두 번쯤 몸에 심각한 고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서울고등법원의 별명은 서울고생법원 또는 서울고등학교다.

야근·조근은 기본…자다가도 ‘벌떡’

    나는 변호사가 된 후에, 이미 사십대에 들어선 어느 고등법원 판사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에 가슴이 아팠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 문자메시지는 이랬다. “몸이 부서지도록 아픕니다. 아직도 판결 다 못 썼는데……” 판결을 다 못 썼다는 말은, 기말고사가 내일인데 아직 책 한 장도 읽지 못했다는 것쯤 된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시험은 제 일이니 못 보면 그만이지만, 판결을 제 날짜에 선고하지 못한다는 것은 법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써도 써도 기록은 끝없이 올라오고, 떼어도 떼어도 사건은 한없이 배당된다. 담배꽁초는 재떨이에 이미 수북한데, 밤은 이미 지나 동이 훤히 터오는데, 몸은 파김치가 되다 못해 이제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 오는데,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판결을 놓고 기록을 읽는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것도 모자라 어떤 법관들은 야근이 아니라 ‘조근’을 한다. 밤새 사무실에서 기록을 보고 판결을 쓰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퇴근해서 옷 갈아입고 밥 먹은 뒤 다시 출근하는 것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내 경험으로 말하면, 판결 쓰기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 노동이 아니었다. 무슨 화두 같았다. 몽중일여, 오매일여까지야 갔겠는가마는, 동정일여에 비슷하기는 했을 게다. 낮에도 밤에도, 판사실에서도 집에서도, 주중에도 주말에도 판결 중 어려운 대목을 놓고 무언가 머릿속에서 복잡한 검토가 끊이질 않는 것이었다. 세수를 하다가도, 전철 속에서 광고를 바라보다가도, 아침에 산책길을 걷다가도 다르지 않았다. 기록을 다 읽어 보고 판결은 내일 쓰자며 잠자리에 누웠는데 머릿속에서 무슨 자동기계라도 돌아가듯 판결문이 줄줄 쏟아지기에, 혹시 그걸 잊어버릴까 싶어 도로 일어나 판결을 쓴 일이 수도 없었다. 부장판사가 되고 나면 대개 판결을 쓰지는 않고 배석판사가 써 가지고 오는 판결을 검토하기만 하는데, 어느 날엔 기록을 너무 열심히 보고 나자 판결문이 대강 머릿속에서 완성되기에 그게 아까워서 그 자리에서 판결을 써 버린 일도 있었다. 주심인 배석판사로서는 횡재를 하는 셈이었을 게다.

    판결은 당사자에 대한 권력 행사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판결의 결론이다. 그런데 판결의 이유는 그다지 쓰기 어렵지 않으나 결론을 못 내려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단독판사 시절에 법정에 나가기 5분 전까지도 주문(판결의 결론)을 쓰지 못하고 고민한 일이 있었다. 그날 판결을 선고받을 피고인 중 한 사람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할지 실형을 선고할지 결심을 못해서였다. 결국, 어려울 땐 관용의 길을 따르라는 법언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어떤 이혼청구사건에서는 한 달을 넘어 매일 고민하곤 하였다. 한센병에 걸린 처를 수용소로 보낸 남편이 20년이 훨씬 지나 처를 상대로 이혼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이미 다른 여자를 얻어 그 사이에 낳은 자식이 결혼할 나이에 이르자 부득이 호적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제소 이유였는데, 과연 나라면 한센병 처를 버리지 않고 평생의 반려자로 남길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를 앙다물고 이렇게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신청인(남편)의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혼인서약을 한 배우자의 일방이 타방에 대하여 지켜야 할 윤리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그 사건의 결론이 옳았는지 자신이 없다.



시시한 소송은 없어…모두 피 튀기는 ‘현장’

    판결 쓰기는 글쓰기 중에서도 여느 것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판결은 공문서다. 그것은 내면의 고백도 아니고 사실을 기술하는 보고서도 아니고 허구적 갈등을 그려내는 문학작품도 아니다. 소송은 다툼이다. 다툼은 보통 밥을 놓고 벌어지지만, 명예나 신분이나 자유를 놓고 일어나기도 한다. 지면 돈을 내야 하거나 불명예를 안거나 신분이 바뀌거나 교도소로 가야 하는 것이 소송이며, ‘시시한 소송’ 같은 것은 당초에 없다. 송사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안다. 판결은 그 괴로운 일의 최종 결과물이다. 판결은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것이며, 다툼을 공적으로 해결지어 놓는 법원의 의사표시다. 판결은 포즈가 아니고 수사가 아니다. 판결에서 보이는 갈등은 허구가 아니라 피 튀는 현장에서의 다툼이며 승부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판결문의 원본에는 반드시 법관이 개인 도장을 찍게 되어 있다. 이런데도 법관이 판결 앞에서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비양심적이거나 신선이 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말하거니와, 법관의 글쓰기는 법관의 천형이다.

    판결은 항상 결론을 가진다. 판결은 당사자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선언하는 문서다. 그 결론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법은 판결에 반드시 이유를 붙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민사소액사건에서는 예외가 있다.) 이 점에서 판결은 다른 공문서와 크게 다르다. 판결의 이유는 대부분 길고 복잡하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법관의 판결 쓰기가 어려운 것은 결론을 내기 어려워서이고 다시 그 결론을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기 어려워서이다. 권력을 행사하되 문자행위로 설득하라는 이 어려운 주문 앞에, 법관은 늘 전전긍긍한다. 마지막을 매번 도장 찍기로 마감하는 이 독특한 글쓰기 방식은 법관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판결의 복잡한 구문은 악명 높다. 좀 오래된 것이긴 하나, 1969년도에 나온 다음 판결문을 한 번 읽어보시라. “직권으로 살피건대 기록에 의하면 원심이 피고의 원고의 적법한 소원절차를 거쳤음을 다투지 않았음을 뒤집고 다시 한 본안전항변을 물리치며, 그 자백이 진실에 반하고 착오에 기인되었다는 입증이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음이 명백하니 이는 행정소송(무효선언의 의미의 취소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제기에 있어서 소원 제기의 유무가 그 소송요건이 되며 그 소송요건은 법원의 직권심사사항에 속하며 당사자의 자백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원심이 보아 넘긴 위법을 일으켰거나 아니면 이로 인하여 이유불비의 허물을 남겼다고 아니할 수 없어……” 이 글의 뜻은 대충 이러하다. “(당사자가 상고이유로 내세운 문제는 아니지만) 직권으로 살피겠다. (이 사건에서) 피고는 당초에 적법한 소원절차(訴願節次)를 거쳤다는 원고의 주장을 이의 없이 인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중에 가서야 ‘원고가 소원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라면서 이를 본안전항변(소송요건이 흠결되었다는 피고의 항변)으로 내세웠다. 원심은 ‘피고의 당초 인정행위(자백)가 진실과 다르고 또 착오에 빠져 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라고 판단하여 피고의 본안전항변을 물리쳤다. 그런데 행정소송을 제기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소원을 제기하여야 하고, 법원은 원고의 이러한 소원을 제기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는 피고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직권으로 심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으로서는 소원을 거쳤는지 아닌지를 놓고서 당사자인 피고의 인정(자백) 여부에 구애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이 어떤지를 심리하였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법을 어겨 판결한 것이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판결에 이유를 제대로 붙이지 못한 셈이 된다.”

멀쩡한 문장 쓰던 사람도 사법연수원 거치면…

    우습게도, 이렇게 복잡한 문장은 훈련의 결과다. 멀쩡한 문장을 쓰던 사람도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치면서 법조계의 그 복잡한 문장 쓰기를 배우게 되고, 드디어는 그것을 자기의 문체로 받아들인다. 겨울날 사무실에서 판결을 쓰다가 문득 창밖에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본 법관들은 “오늘 같이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는 각 밖으로 나가서 각 애인을 만나야 하는데 왜 이렇게 각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농담을 한다. 판결문에 적힌 동사의 주어 또는 목적어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일 경우 그 주체나 객체에 대한 법률요건의 충족이나 법률효과의 귀속이 각각 이루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각(各)”이라는 부사를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다가, 급기야 아무 데나 “각”을 붙이게 되는 것을 넌지시 자조하는 농담이다.

    도대체 판결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긴가? 판결은 상식으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상식이 복잡하다고? 그렇다. 법관이 알고 있는 상식이란 법 공동체 내의 누구든지 승인하는 이치다. 판결은 복종되기보다는 승복되어야 한다. ‘칼도 지갑도 없는’ 사법부가 내리는 판결이 가지는 권위는 오직 논리와 상식으로 뒷받침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결의 결론에 이르는 단 한 개의 사유과정도 판결문에서 빠뜨릴 수 없다. 지는 쪽의 주장은 단 한 개도 남김없이 전부 배척해야 한다. 네 말이 전부 틀렸다고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는 쪽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어떤 결론에 가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단 한 개의 벽돌, 단 한 발짝의 걸음도 생략할 수 없다. 진 쪽의 변호사가 눈이 밝은 이라면, 그는 판결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허투루 밟은 논리의 구멍을 찾아내어 전동드릴이라도 들이대듯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판결을 깰 것이다. 그래서 법관은 판결에서 펴는 논리에 조그만 흠이라도 없애려고 사력을 다한다. 그런 판결이 간단해질 리가 없다.  
     
    판결은 논리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서 법관들은 이유를 찾아 결론을 내기보다는 먼저 결론을 내리고 다음에 이유를 찾아간다. 아마 이 진술에 사건의 당사자들은 펄쩍 뛸 것이다. 뭐? 법관이 결론부터 먼저 내린다고? 종종 그렇다. 어떤 사건에서는 논리가 결론을 위한 포장물이 되는 일이 가끔 있다. 미국 대법원의 위헌심사권을 세운 최초의 선례는 마버리 대 메디슨 사건의 판결이다. 그 사건에서 마셜 대법원장은 누구나 수긍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논리를 내세워 그의 정적(政敵)이 원하는 결과를 주면서 그 반대급부로 법원의 위헌심사권을 얻어내었다. 그는 먼저 위헌심사권을 가지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어서 이유를 써 내려간 것이다. 그의 논리적 연금술은 궤변이지만 그 궤변은 사법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가 되었다. 무릇 글의 두 기둥이 진실과 논리라면, 판결은 때로 논리로 포장된 진실이기도 하고 때로 논리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재판에 진 이들 중 몇은 판결을 진실 없는 논리 또는 진실도 논리도 없는 헛소리라고 욕하겠지만. 

최소한의 상식 기반…부사·형용사 사용 절제

    판결에서 인정하는 사실, 법적인 효과가 나오는 전제로서의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우선, 알쏭달쏭하게 들리겠으나,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실상 알 수 없다. 법관에게 진실이란 증거법의 테두리 내에서 인정되는 한정된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송법적으로는, 증거라는 도구로 진실이라는 화석을 캐는 것이 이른바 사실인정의 작업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사실은 화석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증거가 없는 경우도 있고 증거를 믿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증거가 없는 경우 누가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인지, 이런저런 증거가 있을 경우 어느 증거를 더 믿을 것인지를 논하는 것이 증거법칙인데, 이는 상식과 확률의 법칙일 뿐이다. 그리하여 법관이 증거와 증거법칙에 의하여 파악한 사실과 그야말로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진실은 필연적으로 어긋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법관이 자기 자신의 직관적 판단만을 믿어, 증거와 증거법칙을 바탕으로 삼아 형성되어야 마땅할 심증의 금을 벗어난다면 그 순간 법관은 위험한 독단의 세계, 상식을 벗어난 아집의 세계로 빠질 가능성에 노출된다. 법에서 말하는 ‘실체적 진실’이란 그러므로 일종의 관념이며 이념에 불과하다. 어쩌면 의도적 오류라고 할 수도 있다. 판결은 이런 위악적 태도로 최소한의 상식과 논리를 지켜가는 것이다. 구체적 타당성의 대척점에 서 있는 법적 안정성이란 아마 이러한 상식과 논리의 세계일 것이다. 법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은 이렇게 지켜지는 것이라고, 법관들은 믿고 있다.

    이 심증형성의 자유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자유심증주의라는 이 원칙은, 심리과정에서 형성된 사실심 법관의 심증은 탓할 수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법관에게 사실인정에 관한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어놓은 견제장치라고는 경험칙과 논리칙밖에 없다. 경험칙이란 세상 살면서 경험하게 된 원칙이라는 것이고, 논리칙이란 논리적인 사고의 법칙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억 원의 채무를 말 한 마디로 면제해 주었다는 주장이나 증언 따위를 법관은 믿지 않는다. 경험칙이란 알고 보면 인간이 가장 이기적인 행동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말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이유 없이―이타적 이유 같은 것은 이유가 아니다―일억 원의 권리를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이 경험칙이다. 문서도 없는데 일억 원이 포기되었다고 인정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논리칙이다. 그리하여 진실과 사실은 때로 어긋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판결엔 부사와 형용사의 사용이 늘 절제되어 있다. 수사법 따위는 들어올 틈이 없다. 원고가 피고에게 준 돈의 액수는 정확해야 한다. 막연히 “막대한 액수의 돈을 주었다”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슴을 저미는 사랑 따위도 판결에서는 묘사하는 일이 없다. “원고와 피고는 서로 사랑하였다” 따위의 문장은 판결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제하거나 통정하거나 혼인할 뿐이며, 그게 아니면 교제를 중단하거나 통정관계를 끊거나 이혼할 뿐이다. 어떠한 사랑에도 진실은 있다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상대가 다른 사람과 혼인관계에 있을 경우 어쩌면 생애 최대의 결단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행위는 판결에서 “1회 성교하여 간통하였다”라고 건조하게 표시될 뿐이다. 거기에 은유와 직유의 자유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생략이 주는 강한 암시적 효과 따위도 의도될 수 없다. 만약 그럴 경우 그 판결은 이유 불비의 위법을 저지르는 것이며, 파기를 면할 수 없다. 이것은 판결이, 그리고 판결이 표상하는 법률생활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기반을 지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판결은 삶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움켜쥐려는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던 사람, 아무리 아름다운 행동을 보여 주던 사람도 법적인 분쟁에 이르면 모두 어눌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렇게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판결의 세계에서, 가끔은 예외가 있다. 1977년의 한 대법원 판결에서 다수의견에 맞서 어느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밝히며 그 의견의 마지막에 빚어 놓은 다음의 문장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수사도 필자가 대법관이었기에 양해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급심에서 그런 언사를 농하였다면 아마 그는 ‘튀는’ 법관, 돌출행동을 할 위험이 있는 인물이 되고 말았을 터이다. 엄혹한 시절이었던 1985년, 비상계엄군법회의의 재판권에 관한 문제를 두고 대법원이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갈렸을 때 소수의견을 집필한 이일규 대법관은 글 끄트머리에 “나로서는 다수의견이 헌법정신에 눈을 뜨지 못하여 헌법적 감각이 무딘 점을 통탄할 따름이다”라고 썼다. 그 때도 법관들은 한편으로 군사정권을 향한 그 일침에 무척 고소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판결에서 다른 법관들에게 그 정도의 말을 하는 것도 거의 금기사항인 법원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법관의 판결은 그토록 조심스러운 것이다.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오래 전 한 번은 이혼사건의 판결에서 우리 부의 배석판사가 “피신청인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믿었고, 이를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아 시부모와 갈등을 일으켜 그 결과 신청인(남편)과 불화하게 되었다”라고 쓴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피신청인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아 시부모와 갈등을 일으켰고 그 결과 신청인과 불화하게 되었다”라고 고쳐 놓았다. 앞의 문장에서처럼 문제 된 사실의 설시를 중문으로 구성하면,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이 이혼사유가 되는 듯이 읽힐 것 같기에, 그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든 간에 또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 간에, 법원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헌법상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를 염두에 둔 내 견해였다. 다만 그로 인하여 제사 문제를 놓고 시부모와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남편과 불화한다면 그것은 이혼사유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판결의 문구 하나 하나에 극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도 본 일이 있다. “원심은 그 판시(判示)의 이유로 피고인의 판시 행위가 그 판시의 법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는바, 기록에 대조하여 보면 거기에 논지가 주장하는 위법이 없다.” 그대로 읽어서는 도대체 피고인이 무슨 행위를 하였고 그것이 어떤 법에 위반하였다는 것인지, 원심법원이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아가 대법원은 왜 원심법원의 판단이 옳다고 하는지, 도무지 짐작도 못하게 써 놓은 이 판결은 아예 소통을 포기한 듯 보인다. 이 판결의 배경에는, 문제의 처벌법규가 악법으로 이름난 긴급조치였다는 사정이 있었다. 피고인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판결문에 적어 놓기가 껄끄러웠던 어느 대법관이 ‘적당히 넘어가는’ 방식으로 쓴 판결의 예다. 이런 것도 조심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남의 말을 자꾸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렇지, 읽고 있자면 법관인 나마저도 답답해지는 판결이 있었다. “비록 민주주의의 원론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하는 여건에 따라서는 범죄가 될 수 있다”라든가.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던 목사가 계엄법위반죄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런 어거지 판결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남의 판결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련다. 2006년에 나온 어느 고등법원의 판결은 이런 문장을 담고 있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아름답지 않은가. 나도…… 그런 판결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소심한 내겐 따뜻한 가슴으로 자칫 법을 어길 수 있을 위험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역시 법관의 글쓰기는 그에게 천형이다. 오늘도 그 천형을 달게 받아, 어두운 밤 쓰고 또 쓰고 있을 법관들을 생각하며, 나는 가슴이 시리다.

 

글 정인진 판사 노릇을 이십 년 넘게 했다. 젊은 시절 판결 쓰다가 그만 진을 다 뺐다고 믿지만, 아직도 마음에 쏙 드는 판결을 써 보지 못했던 걸 아쉬워 한다. 변호사가 된 후론 법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사람들이 믿을지 고민하고 있다. 이제, 글 잘 하는 건 그 다음이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야만의 무기 - Sweet Nuk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제 보니 참 많이 닮았다. 2008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의 촛불과 2003년 부안 반핵민주광장에서의 촛불. 광우병과 핵의 공포. 거짓과 불신. 좌빨언론에 속아 넘어간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극렬 환경단체에 놀아난 촌놈들의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되던 풍경. 헌법 제1조에 의거해 나라의 주인임에도 주인행세를 하는 순간 쏟아졌던 물대포와 소화기, 날아들었던 방패와 곤봉, 군홧발. 눈물.

노무현 정권은 인구 2만 명의 부안읍에 전경 7천 명을 투입해 ‘경찰계엄’이란 신조어를 만들었고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 사거리에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명박산성’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두 정권 모두 자신들의 과오를 교훈삼아 군대를 동원해 평택 대추리를 밀어붙이고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을 진압했던 것은 아닐까?

200일 동안 거르지 않았던 촛불집회, 6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300여 명이 사법조치를 당했음에도 집회참가 연인원이 경찰추산으로도 20만 명을 넘겼던 부안은 마침내 국책사업을 막아냈다. 투표율 72%, 방폐장 유치반대 91.83%. 참여민주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참여정부의 폭압 속에 꽃을 피웠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2005년 불법과 탈법, 관권과 금권이 난무한 가운데 전국 4개 지역이 경합한 주민투표를 거쳐 방폐장은 경주로 결정됐다. 다시 시작된 거짓과 불신, 시기와 반목.

민주주의는 제도인가, 운동인가? 법과 절차는 인간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가? 인권의 존재이유는 간명하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화를 겪은 뒤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은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저항이 가능하려면, 야만의 무기와 맞서려면 보다 새롭고 더 나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열망하고 기획되어야 한다.

-------------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청탁을 받아 영화에 대한 인권해설이란 걸 처음으로 써보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몇 주 전부터 《사람》 사무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 서너 명이 찾아옵니다. 둘러앉아 회의를 합니다. ‘작은 음악회’라는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별로 음악적 조예가 깊어 보이거나 문화와 친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유서대필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20년을 맞아 하는 행사랍니다. 꽤나 시끌벅적 회의를 합니다만 그 모양새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 약간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1991년 5월 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죽음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김기설 씨의 유서를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였던 강기훈 씨가 대신 작성했으며 자살을 사주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로 한국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으며 큰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항간에 떠돌고 보수언론이 확대재생산하던 ‘죽음의 배후설’이 공안기관의 조작을 통해 ‘터무니없는 소리’에서 ‘그럴 법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기훈 씨는 자신의 무죄를 끊임없이 주장했고 유서의 필적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음에도 결국 그는 3년 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정한 발단은 김기설 씨의 죽음 이전, 1991년 4월 26일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촉발된 분신정국에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국면을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991년 그해 저는 대학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91년 5월’과의 인연은 대학생이 된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 우연찮게 시위에 참여하게 됐고, 바로 그날 성균관대생 김귀정 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 속에서 질식사를 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날 저는 거리로 쏟아져나온 무수한 대학생들과 함께 뛰어다니면서도 어쩐지 국외자가 된 듯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분신과 투신 소식,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란 김지하의 <조선일보> 칼럼,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씨의 시신을 빼돌리기 위해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오는 백골단의 사진, 저녁 9시 뉴스에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장면 등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20년, 팔팔했던 젊은이를 머리 희끗한 중년 사내로 변하게끔 한 그 세월을 떠올리자 저절로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되짚어지고 지금 선 자리를 둘러보게 됩니다. ‘91년 5월’로부터 서너 해가 지난 어느 날, 대학 학생회관 화장실. 아마도 ‘인권’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건 그때였을 겁니다. 소변기마다 붙어있던 A4 종이 한 장, 지금은 <인권오름>으로 바뀐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이었습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뭐, 이런 것도 있네.’하며 지나쳤던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십 수 년이 흐른 뒤 벌써 몇 년 째 인권잡지를 만들고 있으니 사람 사는 게 참 모를 일이지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이 2006년 1월, 《사람》이 생긴 지 반년이 지나서였으니 저로서는 이 잡지가 어떤 취지나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왜 하필 이름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했는지 그 속사정까지는 알 지 못합니다. 대학에서 브렌드 네이밍(Brand Naming)이라고 하는 상품 이름붙이기 수업을 들은 적도 있지만 이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저로서는 의견을 내봤자 묵살되었겠지만 아마도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냥 ‘인권잡지’라고 하자고 했을 겁니다. 잡지이름이 참 좋다는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하면 대개는 그게 무슨 잡지냐고 되물어옵니다. 그래서 “인권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권잡지’, 괜찮지 않나요? 다만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때문인지 간혹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다니는 줄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름까지 ‘인권잡지’면 더 헷갈릴 듯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을 창간하며 어떤 이는 인권현장을 취재하여 특종을 터뜨리는 시사지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깊이 있는 이론과 비평을 담은 전문지를 구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교양지가 됐으면 했을 수도 있지요. 월간으로 나오던 그 시절 《사람》에는 이러한 세 가지 지향이 그런대로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평택 대추리 싸움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인권활동가이자 재단 상임이사까지 겸직한 박래군 전 편집인과 달랑 저 하나뿐인 기자로 매달 거르지 않고 잡지를 내는 것만도 벅찼습니다. 원고를 청탁하고 취재하고, 취재한 내용을 기사로 만들다 짬을 내 다음호를 구상하고, 교정을 보는 와중에 기획회의를 준비하고. 그렇게 서른 세 권의 월간 《사람》을 낸 뒤 6개월의 휴식기를  거쳐 격월간 《사람》으로 개편한 데는 여기서 오는 피로감도 한몫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잡지를 만드니 여유가 생겨 좋기는 합니다만 격월간이라는 것이 참 어정쩡합니다. 휴간을 결정하고 나서 편집부에서는 아예 폐간을 하자는 안부터 인터넷 웹진으로 전환하자, 계간지로 만들자 등등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제작비용과 인력충원이 어려운 현실도 감안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권분야에서 정기적으로 나오는 종이 잡지 하나쯤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 현실가능하고 지속가능한 형태가 격월간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일간지에 인권담당 기자가 생길 정도로 제도언론에서 인권문제를 다루는 비중도 높아졌고 인권의 각 영역 별로 단체에서 발행하는 웹진이나 뉴스레터, 소식지도 많지만 좀 더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영역을 가로지르는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돌아보면 ‘사람에 주목하는 잡지’, ‘경계를 넘나들며 인권의 영역을 넓히는 잡지’, ‘다양한 시각과 상상력으로 인권운동과 만나는 잡지’라는 개편 당시 모토에 얼마나 부응하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말에 “뭇사람의 입은 쇠를 녹인다.”는 말이 있다. 고대 가락국이란 나라에서 군중들이 모여서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구지가’나 ‘해가’와 같은 고대가요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세상의 권력과 부와 언론 등을 장악하고 있음으로 세상에 하나 아쉬움이 없는 세력들로부터 외면당하고는 한다. ‘인권’이란 지팡이로 세상을 두드려 깨우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고 한 입으로 외치는 일에 《사람》은 모든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뭇사람의 입’이 되어 강철 같은 반인권의 현실을 녹여버리고 싶은 게 《사람》의 작지만은 않은 바램이다.




2005년 7월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서 뱉은 첫소리입니다. 바다 건너 나라의 어느 혁명가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말은 여러분의 무기인가요? 언제부터인가 “내가 쏜다.”는 말이 ‘한 턱 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총알이 돈의 은유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한편 섬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이 무기인 사람들과 말이 무기인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곳곳에서 점점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입니다. 
 
잡지란 말은 근대 이후 서구에서 들어온 대다수의 단어들이 그렇듯 일본 사람들이 영어 매거진(magazine)을 옮기며 만든 것이지 싶습니다. 매거진의 어원은 창고를 뜻하는 네덜란드어의 ‘magazien’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편 영어 매거진은 잡지라는 뜻 외에 탄약고나 탄창이란 뜻으로도 쓰인답니다. 포토저널리즘에서는 사진을 찍는다는 뜻과 총을 쏜다는 뜻을 함께 가진 슈트(shoot)를 거론하며 포토저널리즘의 속성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잡지는 좀 더 넓고 긴 시공간을 향해 던져지는 그물 같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르는 물건을 이것저것 주워 담아 차곡차곡 제여 놓는 일 같기도 합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1894년 반유태주의의 광기를 등에 업고 무고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몰았던 프랑스에서 소설가 에밀 졸라가 신문에 기고한 「나는 고발한다!」의 한 대목입니다. 졸라는 이 글로 인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영국 망명길에 올랐야 했지만 그로부터 7년 뒤 드레퓌스는 재심을 거쳐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무수한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가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혹독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2007년에서야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으며 아직도 대법원에서 재심결정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화장실 소변기 위에 붙은 <인권하루소식>을 무심히 읽어가던 그 무렵 워낙 악필인데다 특히 매직글씨는 지독하게 못 쓰던 제게 주어진 일은 다른 이들이 밤새도록 써놓은 대자보를 새벽녘 교정 곳곳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임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자보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팩스로 들어온 <인권하루소식>을 복사해 화장실 칸칸마다 붙이던 이의 마음도 그랬을까요? 쉰 번째 《사람》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50이란 숫자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때의 심정, 그 마음만은 잃지 않으려 합니다.



- <사람> 50호 편집인의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잡지가 참 많습니다. 가끔 들리게 되는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가면 잡지의 숲에 있는 듯합니다. 정부기관에서 나오는 홍보물(육군, 공군, 해군에서 따로 잡지가 나오는데 총천연색 그야말로 삐까번쩍합니다), 지자체 등에서 나오는 지역홍보잡지, 매우 세련되고 볼 거리도 많은, 이른바 '사보'라 불리는 기업잡지, 문예지, 시사잡지, 의료와 교육, 과학 등등의 전문잡지와 각종 학술단체에서 내는 학술지...

한국에 잡지 종류가 몇 가지나 될까요? 한국잡지협회에 따르면 문광부에 등록된 정기간행물 수가 4500여 가지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지요. 여기에 각 단체나 동호회에서 발간하는 간행물, 소규모 비정기간행물까지 더하면 족히 만권은 훌쩍 넘을 것 같습니다.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이 무수한 잡지 중에 흑자를 내는 잡지는 정말 드물다고 합니다. 어느 날 미용실에 갔다가 우먼OO인가 여성OO인가 하는 잡지를 들춰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A4 크기에 웬만한 사전 두께의 올칼러 잡지가 단돈 6천원! 제가 만드는 잡지와 같은 가격이라니... 글보다 광고가 더 많고 잡지를 읽는 독자도 글보다는 광고를 보려고 읽으니 광고료에 기댄다면 6천원에 사은품까지 듬뿍 얹어주어도 밑질 것이 없겠지요. 하지만 광고에 기댈 수 없는(또는 기대지 않는) 잡지는 여간 살림살이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광고주들이 모여 시사월간지에 광고를 줄이기로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7~80년대 시대를 풍미했던 시사월간지였지만 이제는 그 독자층이 더 이상의 구매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매달 창간하는 잡지가 열댓개인 반면 폐간 잡지는 수십가지라고 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인구는 두배지만 잡지 시장은 열배가 넘고 가장 많이 팔리는 <문예춘추>는 45만부에 달한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지요.

팔리지도 않고 영향력도 없고 게다가 재미까지 없는 인권잡지를 만드는 저를 만날 때마다 제 친구는 늘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각종 운동권 잡지를 통폐합해서 메트로처럼 만들어 무가지로 뿌려야 한다고 말입니다.(주로 지하철역에서 뿌려지는 무가지는 하루 한 종류 당 발행부수가 수도권에서만 4~50만부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도 몇 해전에 들은 이야기이니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목소리를 널리 알릴 것인가를 고민할 때 솔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몇 백 페이지짜리 두떠운, 글자만 빼곡한 운동권 잡지를 나눠준다면 사람들이 받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더 큰 걱정은 그 가운데 없어지거나 줄어들 다양성입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보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사무실로 날아오는 잡지도 상당하고 이메일로 들어오는 웹진도 참 많습니다. <인물과 사상> <녹색평론>에서부터 장애운동 언론의 선구자격인 <함께걸음>, 전쟁없는세상이란 평화단체의 소식지(이번호 특집은 '군사주의, 기후변화를 말하다'라는 매력적인 주제를 다뤘군요), 늘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되는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나오는 <랑>이란 웹진, 인권운동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인권오름>... 이렇게 적다보니 어딘가를 빼먹고 욕을 들어먹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잡지가, 인권잡지가 자본과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보다 널리 읽히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 아니 되도록이면 무료로 배포되는 것은 너무나도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백인백색. 이웃나라 일본에서 2만7천명이 이번 지진으로 사망 또는 실종했다고 합니다. 이건 달리 말해 2만7천여 개의 생명과 역사와 목소리가 사라졌음, 찾을 수 없음입니다. 이들이 그저 지진 피해 상황판에 적힌 숫자에 갇히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듯 인권잡지는 인간의 존엄성에 다가가는 수없이 많은 갈래길을 찾아나서야 하겠지요. 그래서 운동권 잡지의 통폐합을 꿈꾸기보다는 더 많은 인권잡지가 생겨나고 더 많이 더 싸게 발간되는 날을 꿈꾸려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천정명(천둥)이 의식화되고 있다. (어릴 때 민란에도 참여했으니 정확히 말해 재의식화인 셈이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 그를 의식화시키는 건 불순세력이나 이념서클, 늘 웃기만 했던 선배가 아니라 당대 현실이다.

 

2.
<추노> 이후 되도록 빼놓지 않고 보는 드라마가 있다. 같은 사극이지만 결은 좀 다른 <짝패>다. 
 
솔직히 작가가 김운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군대에서 채널 선택권이 있을리 만무했다. 매일 수상기 앞에서 허리를 펴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무릅에 주먹쥔 손을 올려놓은 차렷 자세로 드라마를 시청해야 했는데 그때 일일드라마가 김운경의 <서울의 달>이었다. 

한석규, 최민식, 김원희(아, 김원히). 지금으로 치면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그때만 해도 다들 무명이었다. 채시라 정도가 톱클라스였을 뿐. 하여튼 나는 김운경도 김수현처럼 작가론이 나올만한 작가로 생각된다. (벌써 나와있는지도 모르겠다.) 

3.
대학시절 어떤 선배는 내게 "사극은 리얼리즘일 수 없고 반동적이기 쉽다"란 말을 한 적 있다. 나도 상당부분 동의했던 것 같다. 그때 사극이란 <용의 눈물>이나 <여인천하>처럼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다툼이나 궁중암투가 주요 소재였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사극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짝패>의 불순세력 이름은 '아래적'이다. 내가 돌아온다와 아래로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는 게 주관적인 내 해석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꺽정>도 있었고 <다모>도 떠오르지만 왜 이렇게 지금 시대의 불평등과 차별, 양극화와 같은 예민한 문제를 다룬 사극이 완성도 높은 서사와 긴장감을 갖고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누가 분석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소설, 문학의 빈자리를 드라마가 채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4.
뭐, 그래도 결국 텔레비전 드라마일 뿐 아니겠냐고? 모든 고전은 당대 시정잡배가 즐기는 통속물이었다. 지금 한국의 드라마 또는 사극이 그럴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나도 천정명처럼 재의식화가 절실하다. 홍세화 선생인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끊임없는 재의식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관념화, 보수화되기 십상이다.  

아이가 둘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버릴 수 없는 것, 소중한 것이 늘어난다. 세상은 왠지 더 복잡한 듯 보이고 몸과 발은 점점 무거워진다. 아는 것, 경험한 것이 늘어날 수록 놀라움과 분노, 설레임은 줄어든다.  

늦지 않게, 천둥이처럼 저작거리로 나가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