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격월간 <사람>이란 잡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원고를 부탁드리려고 전화를 드렸는데요. 저희 잡지에서 다음 호에 OOO을 특집으로 다루려고 하거든요."

"저는 잡지에 원고 안 씁니다."

"바쁘시겠지만 다음 달 말까지만 써주시면 되는데, 이 주제에 대해 필자를 찾기가 너무 힘들어서요. 조금만 시간을 내주실 수는 없는지..." 

"전 잡지에는 글 안씁니다. 미안합니다."

 

하루종일 언짢았다.

잡지를 만들다보면 청탁을 거절당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유도 여러 가지다. 일이 너무 바빠서, 집안에 일이 있어서, 쓰고 있는 게 있어서, 주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서, 이미 다른 데다 썼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등등등.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잡지도, 널리 알려진 잡지도 아니고, 고료는 정말 쥐꼬리만하고 그러니 못 쓰겠다고 하면 도리가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신선한 주제, 새로운 접근, 다른 시각을 기획하려고 하면 필자 찾기가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다. 둘러보면 교수도 많고 학자도, 연구자도, 전문가도 넘쳐나는데 그렇다.  

흔쾌히 써주마 했다가 마감을 훌쩍 넘겨 편집자를 괴롭히는 분들이 야속할 때도 있다. 청탁을 할 때는 기본적으로 필자가 쓴 관련 글들은 찾아보는데 다른 데 쓴 글을 거의 옮겨놨거나 재탕 삼탕한 글을 받았을 때는 당혹스럽다. 한 가지 주장(혹은 이론)을 너무 울거먹는다는 생각이 드는 연구자도 있고 자기 분야가 아닌데 지나치게 기웃거리는 것 아닌가 싶은 학자도 있다.(물론 정말 좋은 글을 보내주시는, 게다가 원고료도 마다하시는 다수의 훌륭한 필자-교수, 연구자, 전문가 님이 이 동네에는 더 많다. 다만 마감은 고무줄이지만^^)

존경스럽고 늘 많이 배우고 있지만 솔직히 학자라면, 연구자라면 기본적으로 학문에 대한 전문성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매체에 품앗이를 하느라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드는 분도 있다.   

그런데 어제 통화한 교수님은 그 정반대 경우였다. 단호했다. "잡지에는 글을 안쓴다."는 말은 곧 학술지나 단행본을 위해서만 글을 쓴다는 말로 들렸다. 어떻게 학자가, 또는 연구자가 이런저런 청탁에 다 응하고, 이런저런 잡지에 글을 쓰면서 무슨 시간이 있어 자기 학문을 연구하겠는가. 그 시간에 자신의 연구에 더 몰입하고 집중하는 것이 자신에게, 그리고 한국사회에 더 충실한 전문가로서의 역할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에서 "잡지에는 안 쓴다."는 원칙을 세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원칙이 그리 나쁘지 않고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 교수님이 재직하고 있는 국립대는(굳이 국립대가 아니더라도) 교수님의 연구활동에 세금도 들어가고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그에 걸맞는 사회적 발언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필요한 건 아닐까? 왜 학술지, 단행본은 되고 잡지는 안 될까? 최소한 OOO이란 주제가 어떤 취지이고 지금 시기 무슨 의미인지는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네다섯개의 물음표가 내 머릿속을 마구 어지럽힌다.   

우리는 모든 순간순간 최선의 삶을 살수는 없다. 아니 어떤 이는 신처럼, 성자처럼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다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그래서 "이게 최선입니까?"라는 질문은 범인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잡지에는 글을 안 쓴다는 교수님에게, 그리고 잡지를 만들고 있는 나에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11-01-20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 평가에 잡지는 그야말로 잡스럽게 취급해서 그렇겠죠. ㅎㅎ 뭐, 실력도 없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나무처럼 2011-01-20 02:15   좋아요 0 | URL
그럴수도 있겠는데... 청탁 전에 찾아본 바로는 실력도 있고 나름 진보적(?) 관점을 가진 듯한 분이셨는데.. 게다가 사회과학 분야여서 제가 받은 충격이 더 심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