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파업 1500일을 넘긴, 본의 아니게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되어버린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헤어지면서 어쩌면 쌍용자동차 파업노동자들의 싸움은 끝난 싸움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잘 한 번 해보자, 이런 느낌이 아니라 언제 끝날 지 모를 터널에 그들이 이제 막 들어선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과 막막함.
어제 용산참사 300일을 맞아 벌어진 굿판에서 "우리는 힘들지 않다!"는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에 담긴 진실이 가슴에 꽂힌다. 용산참사 싸움은 올해 안에 끝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싸움에서 열세에 있는 편, 사회적 약자들에게 긴 싸움만큼 힘들고 지치고 고달프고 두려운 건 없다. 기륭, 이랜드, 용산, 쌍용, 그리고 촛불. 싸움은 점점 길어진다. "질긴 놈이 이긴다"고? 어디 한 번 계속해볼까? 니들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다른 놈들도 이렇게 버틸 자신 있어? 한번 해볼래? 자본과 국가가 그렇게 말하며 시범 케이스를 만드는 것 같다.
#2.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한자성어를 선정해 발표한다. 몇 년 전부터 몇몇 주류언론에서 이걸 꽤나 비중있게 소개하면서 꽤 알려졌다. 교수들 특유의 '아는 척' 하는 태도, 가르치려고 드는 고질적 직업병이 보여 영 불편하지만 한 해를 단 네 글자로 정리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작업이다.
며칠 전에 만난 지인은 "올해 사회운동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지리멸렬'이다"라고 했다. 지리멸렬.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아직 한 달 좀 넘게 남은 2009년이지만 올해를 돌아보면,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파업, 미네르바 사건, KBS와 YTN 사건과 미디어법,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 연쇄살인과 성폭력 범죄 등등이 떠오른다.
지리멸렬. 요즘 가끔씩 지난해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한여름밤의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장대했고 강렬했다. 그렇지만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3.
뤼신이 했다는 말. '고통의 기억과 연대는 가능한가'라고 묻는 서경식이 번역한 '희망, 소망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의 없다. 그래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지난 10년 동안의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2009년은 그리고 앞으로 2010년대는 무엇으로 기록될까. 21세기에도 희망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까.
오에겐자부로가 애용하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희구한다'는 표현이다. 희망을 바라고 구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저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라고 구해야 한다. 우선 나부터 지리멸렬, 우리 안의 패배주의와 싸워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