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능일. 일주일 전부터 오늘 날씨가 어떤지 알려준다. 일기예보가 아니라 메이뉴스에 나온다. 공무원들의 출근시간도 조정된다. 수험표만 있으면 경찰차든 퀵서비스 오토바이든 곧바로 수험생 수송에 투입된다. 그리고 며칠 뒤 서OO학교 OOO가 수능성적 비관으로 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1단 정도 크기로 등장할 것이다. 매년 그래왔다.
이 죽음의 행렬은 비단 수능시험 성적 공개 전후의 일만은 아니다. 2005년 279명, 2006년 232명, 2007년 309명, 그리고 작년에 317명. 성적비관으로 자살하는 학생의 숫자가 거의 하루에 한 명 꼴에 다가가고 있다. 이 나라 권력자들이 좋아하는 그 OECD에서 청소년 자살률 1위를 고수하고 있고 그 상승추세도 매우 가파르다.
평균 수면시간 5.6시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12시간 35분, 35%가 주1회 이상 언어폭력을 당하고 50% 이상이 주1회 이상 체벌을 경험하며, 머리길이와 모양, 옷 입는 것, 휴대전화 소지 등 일상적인 감시와 규제 속에서 시달리는 이들이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거리에서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이라는 표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 청소년은 주인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여전히 이 시대의 주인은 성인, 어른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를 포함한 각종 선거에서 18세에게도 투표권을 달라는 요구가 있어왔고,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는 최소한 청소년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 선거에서만큼은 선거권을 달라고 주장하며 가상의 청소년 후보를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미성숙한 이들의 치기어린 주장으로, 퍼포먼스나 헤프닝으로 다뤄질 뿐이다.
청소년들은 우리가 이 사회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미래의 주인이니까 우리의 희망이니까 보호해줘야 하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보호주의에 그들은 진력이 났있다. 도대체 내일의 주인이라서 머리카락이 길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희망이어서 잠도 충분히 못자고 12시간 넘게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수능시험을 본 이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하지만 참 많은 동료들은 수능시험장이 아니라 일터에서 오늘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저임금과 인금착취, 체불임금, 부당노동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그래서 수험생만이 아니라 모든 청소녀/년들에게 오늘 하루 정말 수고했다고, 제발 살아남으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