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세월을 무릅쓰고 일주일 동안 처갓집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오래전 약속이라 피할 수 없었지요. 그곳은 휴대전화도 안 터지고 마침 컴퓨터도 벼락을 맞아 인터넷도 끊긴 터라 더위만이 아니라 골치 아픈 세상사에서도 제대로 도망친 꿀맛 같은 휴가였습니다. 그래도 간간히 텔레비전으로 보는 평택 쌍용자동차 뉴스에 애를 태우고는 했습니다.

"고문이 보도되지 않는 것보다 기사거리조차 안 되는 현실이 더 심각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스런 사실을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들고 내려간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스탠리 코언 지음, 창비)이라는 책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200일을 넘긴 용산참사와 먹는 물과 전기, 의료진의 출입까지도 막혔다는 평택 쌍용 공장을 떠올렸습니다. 그래도 두 사건은 비교적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지난 7월 인천에서는 장애인이 도망을 갈 지 모른다는 이유로 석 달 동안 발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 화분받침에 담긴 밥을 먹어야 했던 사실이 시설 내부 고발자의 폭로로 알려졌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장애인 시설을 다녀간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이를 목격했지만 아무도 이런 인권침해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한 이제 더 이상 언론도, 사회도 이러한 장애인 시설에서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대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로 치부해버린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하는 장애인 인권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동안 받은 이메일을 열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장애인 단체에서 보낸 이메일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서울시가 각 구청에 불법농성 참여자가 활동보조서비스를 지원받는 사례가 없도록 철저를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서울시가 가리키는 '불법농성'이란 장애인 시설에서 나와 탈시설, 자립생활의 권리를 서울시에 요구하며 벌인 62일간의 농성을 말합니다. 이 농성에 참여한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을 했지만 서울시는 "서울시정에 반대행위를 한 농성자이기 때문에 지원결정을 유보"한다고 했답니다. 서울시가 보건복지부에 "불법 농성자들에게 활동보조를 지원해야 하느냐?"고 문의했더니 보건복지부는 "활동보조 지원은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사회생활 등에 대하여 지원해야 한다."는 답변을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서비스는 교육이나 의료, 치안이나 소방, 공공교통과 같은 공적 서비스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 서비스를 서울시정에 반대했다고, 합법적 사회생활이 아니기에 중단한다는 서울시와 보건복지부의 말은 소화전까지 단수시키고 의료진의 출입을 막은 쌍용자동차와 어쩜 그리 일맥상통한지요. 앞으로는 반정부 집회 참가자는 버스도 타지 못하게 하고 육교도 건너지 못하며 집회현장에서 다치면 구급차가 출동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증장애인에게 활동보조서비스는 공적 서비스 그 이상의 것, 바로 생존권이라는 사실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2005년 겨울 한 중증장애인이 집에 보일러가 터져 그만 얼어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2007년 겨울에도 홀로 살던 정신지체 장애인이 추위와 배고픔에 탈진해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몸의 근육들이 서서히 위축되어가는 근육이양증 장애를 가진 아들이 화장실에서 넘어져 혼수상태에 이르자 인공호흡기를 뗀 비정한 아버지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활동보조서비스만 있었다면 이들의 죽음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장애운동 단체의 주장이었고, 수 십 일 동안의 농성과 중증장애인들이 휠체어를 버리고 한강다리를 기어서 건너는 투쟁 끝에 비로소 마련된 것이 바로 활동보조서비스였습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나 지자체가 적선을 하듯 내키면 주고 안내키면 마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들 스스로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임을 부인하는 것이자 장애인의 생존을 갖고 야바위를 치는 범죄 집단이라고 자임하는 꼴밖에 안 되겠지요.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진실을 알려야

또 한 통의 이메일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라는 단체의 성명서로 이러한 공공기관의 탈을 쓴 파렴치 집단을 감시하고 고발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의 한심스런 작태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차강석 씨는 중증장애인으로 한 카드사에 신용카드를 신청했습니다. 평소 발가락으로 한 글자씩 자판을 두드리는 그이는 무려 세 시간에 걸쳐 신용카드 신청서를 작성해 카드사에 보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카드사 상담원이 전화를 했고 언어장애도 있는 차 씨였기에 활동보조인이 대신 통화를 해야 했습니다. 상담원은 본인확인이 어려우니 본사로 직접 찾아와 카드를 신청하라고 하여 대필사인과 신분증 사본을 갖고 본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카드사는 소득세 납부를 위한 재산세 영수증을 요청했고 이를 우편으로 보냈지만 자필 사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 다시 법정 대리인인 아버지와 카드사를 방문하라는 요구를 받아야 했습니다. 거리가 먼 카드사 방문이 쉽지 않은 차 씨는 아버지의 사인을 받아 발송하였으나 카드사는 직접 집에 방문하여 신청서를 받아가겠다고 했고 마침 방문했던 날 아버지가 집에 없자 결국 카드 발급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불 나는 일에 대해 차강석 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했지만 더 참담한 것은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정서 말미에 있는 관련법 개정이 국가인권위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진정을 각하 처리를 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성명서에서 만약 인권위가 조금이라도 해결의지가 있었다면 "그 곳이 어떤 카드사였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차강석 씨가 진정으로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어야 했다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말고 함께 사는 길을 찾아보자"고, 용산참사 유가족은 "죽은 이들의 사인이 무엇이고 그 책임이 누구한테 있는지 명명백백히 밝히자"고 수십 번, 수백 번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 국회와 법원, 경찰과 검찰, 그리고 자본과 보수언론은 결코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려 하지도, 그 답을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불법의 딱지에 연연해하지 않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일이 필요한가봅니다. 앞의 책 저자도 말합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적합한 청중들에게, 인간에게 소중한 사안에 관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고 말이죠. 


-<미디어스>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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