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통권 107호 - 2009년 7.8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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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을 나서는 길에 우편함에 <녹색평론>이 꼽혀있기에 들고 나갔다. 찻집에 앉아 우선 목차를 폈는데 '노무현 시대를 돌아보며'라는 주제로 다섯 개의 글이 묶여져 있다. <녹평>과 노무현 특집이라... 의외의 조합에다가 벌써 그의 시대를 돌아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

농촌의 몰락이 짙어졌던 시절(김구일) 
'용산'은 계속되고 있다(박래군)
한미FTA는 노 대통령의 유산인가(송기호)
'국가의 마법'과 지식인의 상상력(박경미)
평형감각을 되찾기 위하여(이계삼)

내가 일하는 잡지에서는 이번 호에 그의 죽음과 삶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거기에 어떤 정치적 견해 차이라던가 일종의 거리두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되고 있으니 뭐 우리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싶었던 심정도 작용했다.  

첫 글은 "나는 경북 예천에 사는 농민이다."라고 시작하는 농민 김구일의 '농촌의 몰락이 짙어졌던 시절'이란 글이다.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글은 생산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우직함과 솔직함이 뭍어난다.

   
 

 나는 노사모 회원도 아니었고, 대통령 선거 때 그분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많은 분들처럼 1988년 5공 청문회 이후로부터 그분은 보통 정치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의 당선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러나 그 5년간 우리 농촌과 농민들이 얻은 상처가 너무나 컸다. 그리고 지금 우리 처지를 생각하면 암담하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게 마음이 편치 않다.

 
   

김구일은 이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농민에게는 유독 가혹했던 노무현 정부"의 5년과 농민들이 받았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 농민대회에서의 두 농민의 죽음, '경자유전'의 원칙이 무너졌던 농지법 개정, 그리고 한미FTA.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노무현의 죽음 이후 주목(?)을 받고 있는 봉하마을에서의 농산물 판매에 대한 이야기다.  

   
 

(...) 퇴임하고,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서 농업에 관한 이런저런 일들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좀 시큰둥한 기분이었다. (...) '개인의 힘'으로 농업을 되살리려 애쓴 것도 중요하고 또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막대한 권력을 가졌을 때, 조금이라도 농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농업이 되살아날 초석이라도 놓아주었다면 (...) 내가 보기에 그 일들은 장기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공하더라도 그 사례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특별한 존재만이 해낼 수 있는 이벤트가 되기 쉬울 것 같았다. (...) 그분의 노력으로 봉하마을의 소득이 높아지고 유명해지더라도, 그것이 농업이 되살아날 수 있는 일반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분의 노력들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 고향에서 행한 아름다운 사회봉사로 기억되기가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그분의 한계는, 우리의 한계이기도 했을 것이다."라며 끝을 맺고 있다. 그의 한계와 우리의 한계. 밀양에서 교사를 하며 녹평에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있는 이계삼의 '평형감각을 되찾기 위하여'라는 글에서는 이 한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나온다.  

   
  그의 5년을 돌이켜보면, 실로 안타깝다. 그는 '개인'으로 체제에 맞서야 하는 일에는 무력하게도 체제에 굴종했고, 체제논리(절차적 민주주의)로 풀어야 할 문제는 엉뚱하게 '개인'의 돌파력으로 밀어붙였다.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은 저밖에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결정한 것"이라는 노무현의 발언을 거론하며 이계삼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미FTA였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노무현의, 그리고 우리 시대의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있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 결국 파국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것은 수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을 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그의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수은중독으로 죽은 15세 소년 문송면의 이야기를 최초로 제기한 국회의원이었던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이 땅에는 역대 정권 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골프장이 들어섰다. 무디스에 대한 투항으로 시작하여 이라크파병, 국민소득 2만달러론, 동북아 금융허브론, 바다이야기, 경마, 경륜, 경정, 온갖 사행성 산업의 창권에다 한미FTA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이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우리 또한 노무현과 함께, 어느정도는 이 시대와 다음 세대들에게 공범들이다. 여기서 어떤 출구가 있을 수 있을까. "'용산'은 계속되고 있다'라는 글에서 박래군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욕망의 구조, 철저한 민중배제의 경제구조"가 아닌 새로운 민주주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묻고 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학이란 생소한 학문을 하고 있는 박경미는 ''국가의 마법'과 지식인의 상상력'이란 글에서 간디의 죽음과 그 암살자 이야기를 한다.  

간디가 암살당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신생 인도 국가가 하는 일을 보고, 절망하고 국가의 개혁 능력에 회의하던 간디는 죽기 직전까지  "정부 권한 전체를 모슬렘 세력에게 양도하라" "폭동지역에서 경찰과 군대를 철수시켜라" "파키스탄과 전쟁 중임에도 국가에서 파키스탄 몫을 넘겨줘라" 등의 주장을 하며 결국 단식 끝에 인도정부가 파키스탄에 돈을 지불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단식이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로 하여금 간디를 암살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나투람 고드세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사회의 중심부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지적이고, 조리있고, 명석하고, 애국적이며, 용감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간디를 쏘기 전 그는 두 손을 모아 존경을 표시했으며 (...)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내가 간디를 죽이면 나는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명예를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간디가 사라지면 분명히 인도의 정치는 현실적인 것이 되어서, 응징할 수도 있게 될 것이고, 군대도 보유화여 강력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나 자신의 미래가 파멸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국가는 살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도는 그의 뜻대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간디의 죽음은 "근대국가 인도의 건설을 위해, 근대국가의 근원적 폭력성이라는 제단 위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는 것이 박경미의 말이다.

노무현의 죽음에는 어떤 필연성이 있을까. 박경미는 그의 죽음에서 인간 노무현의 고통과 애도를 보게 되었지만 공적 필연성은 발견하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다양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무현을 기억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아직 공적 인물로 노무현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아닐까.  

한편 고드세가 "폭력적인 국민국가는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는 신념"이 있고 "국가는 의심될 수 없고 그 대안은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간디를 암살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대통령 노무현'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라크파병을, 한미FTA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날 지식은 고드세의 유혹 앞에 있다. 그것은 국가를 위해 내 안의 간디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이며, '국가의 마법'에 걸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 결국 우리는 현실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상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상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현실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이 없는 곳에서 '국가의 마법'은 작동하기 시작하며, 우리 안의 간디는 죽임을 당하고, 희망도 사라져간다.  
   

 
노무현의 죽음만큼이나, 그 죽음의 전후에 벌어졌던 용산참사와 노동자 박종태의 죽음과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현실의 진면목을 외면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상상력을 발견하기 위해, 내 안의 간디를 죽이지 않기 위해 우선은 <녹색평론>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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