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 시선집 창비시선 68
백낙청 엮음 / 창비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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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 시절, 끌고 다니던 낡은 자전거를 후배에게 물려주고(강매하고?) 『김수영 평전』을 얻었다. 요새 많이들 타고 다니는 산악용이나 경주용처럼 기어가 달린, 그래서 가파른 길도 쉬이 오를 수 있는 자전거는 아니지만 앞에 장바구니가 달리고 뒤에는 한 사람쯤은 거뜬히 태울 수 있는, 꽤 쓸모 있는 탈것이었다. 기어가 없는 자전거는 불편한 만큼 잔 고장이 적고, 조금만 타면 두 다리가 뻐근해지지만 기름이 드는 것도 아니어서 그 무게만큼 마음도 가볍다. 그것은 소유가 주는 자유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소박한 믿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이다. 『김수영 평전』도, 그의 삶도, 그가 남긴 시편도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김수영은 김현과 나란히 놓여진 내 문학 수업의 스승이었다. 고교시절, 그리고 재수학원을 다니며 그들의 글을 통해 나는 비로소 “문학”라는 것이 무엇이며, “시인"이란 어떠한 사람인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윤동주나 김소월에 발 담그고 있던 사춘기와의 결별이었으며 당시 학교에서 배우던 “교과서 문학”의 부정이었다. 신선했고, 충격적이었으며 감동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르자 왠지 답답하면서도 허전했다.


김수영의 시는 진보적이었으나 변혁에까지 나가지는 못했고 그의 시는 그의 시론을 좇고자 했으나 일치되지 못했다. 그의 시론과 그의 시와의 간격 속에서, 그를 둘러싼 현실과 그의 문학과의 괴리에서 그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괴로워했으며 갈등하고 배반하고 모색했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가치이자 극복하지 못한 한계이고 그랬기에 그의 시는 늘 정직하다.

누군는 지식인을 가리켜 나침반에 있는 바늘과 같아서 진리를 향하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존재라 했다. 북쪽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침반이 아니듯, 가리킨다고 해서 한 곳만을 향해 고정되어 흔들릴 줄 모른다면 그것 또한 더 이상 나침반일 수 없다. 나침반의 쓸모는 늘 한 방향을 가리킨다는데 있지 않고 어느 곳에서든 그 한 방향을 찾아낸다는 것에 있다. 그렇듯 명확한 지향점을 가리키면서도 그 지향점에 대해 쉬지 않고 동요하는 바늘과 같은 존재, 그가 바로 지식인이며 그 흔들림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정직하게 노래하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이런! 행과 연갈이가 맞는 지 모르겠다)



랑의 變奏曲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都市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三월을 바라보는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의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暴風의 간악한 
信念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信念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都市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人類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美大陸에서 石油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都市의 疲勞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冥想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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