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북한지역 원폭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이 소식을 듣고 히로시마의 한 원폭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그러나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그는 왜 목숨을 끊었을까.
더 이상 인간에 대한 믿음, 인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어서였지 않을까.

어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그리고 오늘 6월 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의 날이다. 이런 숱한 무슨무슨 날들이 뭐가 중요하랴만은 국정원은 6.25를 맞아 간첩 색출 이벤트(국정원 누리집 ‘간첩 색출’ 황당 이벤트)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래 기사는 오늘자 한겨레 신문 기사다.

고문 당해 간첩으로 몰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려야 했던 사람들, 가족까지도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 아직도 그 고통을 숨기며 세상 밖으로 나오길 꺼려하는 이들은 반성은커녕 일말의 가책도 없이 이런 짓이나 하고 있는 국정원을 보며 또한 검찰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교도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검찰의 회유와 협박을 견디고 증언을 했던 이용현 씨. 고문 피해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치유받기 위해 그와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더 자주 나와야 하겠지만 현실은 다시 야만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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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 안찍어? 너 사형시켜 버릴거야”
[한겨레]‘22년전 간첩사건’ 재심 재판정 나선 교도관의 증언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987년 8월의 일이었다. 증언을 위해 광주로 떠나기 전날 아내에게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받아 생활하라”고 당부했다. 간첩 혐의 피고인의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이야기는 끝내 못하고 집을 나섰다.

영등포구치소 교도관이던 이용현(55·현 의정부교도소 보안관리과 교위)씨는 그해 7월 말 광주고등법원으로부터 ‘김양기 피고인 증인 소환장’을 받았다. 이씨는 간첩 혐의로 구속기소돼 광주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김양기(59)씨를 86년 5월 광주교도소에서 만났다. 이씨는 김씨의 출정을 맡아 2~3차례 검찰 조사에 입회하면서 담당 검사의 폭력행위를 목격했다.

당시 김씨가 “조서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다”라며 손도장 찍기를 거부하자, 광주지검 특수부 김아무개 검사는 “이 ×××, 보안대에서 엄청나게 해놓은 걸 다 빼주고 몇 개만 남겨놓은 건데, 안 찍어? 너! 내가 사형시켜 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어 김씨의 뺨을 두어 차례 때리고 발길질까지 했다. 김씨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이씨가 피고인 증인 소환장을 받자, 간부와 동료들은 “간첩죄 피고인인데 나갈 필요가 있냐” “바보짓 하지 말라”고 말렸다. 며칠 밤을 고민하던 이씨는 ‘양심을 속이는 것은 영원히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해 증언을 결심했다. 법정에 서기 하루 전, 이번에는 광주고검의 이아무개 검사가 찾아왔다. 이 검사는 “보안법 위반 재소자의 말을 들어줄 것이냐?”고 물었다. 이씨가 “사실대로 증언하겠다”고 말하자, 이 검사는 “시국도 안 좋은데, 어디 근무하고 싶은 데 없냐”고 물었다. 이 검사는 이씨를 2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혀뒀다.

하지만 이씨는 87년 8월20일 광주고법 환송심 재판에서 “담당 검사가 김씨에게 ‘조서에 무인을 안 찍으면 사형시켜 버리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씨를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이씨가 덜컥 나와 내가 더 놀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결국 김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이 증언 뒤 ‘요주의 인물’이 됐다. 교도소 안에서 22년 동안 강력범죄 수용자 관리 업무만 맡았다. 그래도 이씨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 사건은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에서 ‘보안대에서 43일 동안 갇혀 물·전기 고문을 받으면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지난 4월 광주고법은 김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22년이 흐른 뒤인 25일 오후 이씨는 다시 광주고법 법정에 섰다. 같은 사건의 증인으로 다시 ‘진실’을 증언했다. 이씨는 당시 증언과 관련해 “김씨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어서 돕고 싶었다”며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 일을 떠올리며 나도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26일 ‘유엔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주는 감사패를 받는다. 이 감사패엔 ‘당신의 증언은 절망의 나락에 내던져진 고문피해자에게 빛과 용기가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김씨 사건 담당이었던 김 검사는 89년께 세상을 떠났다. 변호사로 변신한 이아무개 전 광주고검 검사는 이날 김씨 사건에 대해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김씨 사건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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