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8년 8월, 1971년 8월
올림픽의 열기로 뜨거운 8월. 28년 전 여름은 다른 열기와 분노로 달아올랐다. 올림픽이 국가대 국가간의 경쟁 속에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면, 70년 경기도 광주에서는 오갈 곳이 없는 도시 하층민들이 분노를 참다못해 4시간 동안 들고 일어선 사건이다. 흔히 1980년 광주항쟁은 잘 알고 있지만, 1971년 광주(현재 성남)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강의 시간에 혹시 ‘광주대단지 사건 아는 사람?’하고 물으면, ‘광주사태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대학이건 대중 강좌건 일반적이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대단지 사건은 ‘사각지대’이자 무관심의 대상이다.
얼마 전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대단지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했지만, 보상 자체일 뿐 28년전 8월 11일 대단지에서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관해서는 물음표만이 반복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아직도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을 아직도 무지하고 가난한 폭도들에 의한 난동, 폭동, 광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때 당시 일간지들의 표현을 빌면 거의 예외 없이 ‘난동’(亂動)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뿐만이 아니다. 성남이라는 공간은 1971년 8.10에서 정지되지 않고, 그 후에도 영세민, 빈민, 철거민, 범죄자 등 거주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는 성남 주민의 ‘피해의식’으로 고착화되어 왔다. 바로 성남이라는 공간은 대단지 사건을 기점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변 도시 - 대표적인 예로 분당 - 와 구별되는 무지, 가난, 폭도의 도시처럼 알려져 왔다. 심지어 80년 광주항쟁 이후 계엄이 전국화되었을 때, 성남은 ‘제2의 광주’라고 불리며 경계대상 1호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로 대단지 사건이후 사회적 경계가 현재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의 시위가 무지한 자들의 난동이었을까? 오늘은 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같이 살펴보면서 왜 그들이 잊혀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 딱지 찾아 삼 만리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나 소설 난쏘공에서 보면 잘 드러나듯이, 도시하층민들은 60년대 중반이후 서울로 상경해서 자리를 잡았던 해방촌, 금호동, 옥수동 에는 정착지(定着地)라고 불린 끝이 없는 무허가 건물 마을이 형성되어 도심 주택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최일남 소설인 노새 두 마리를 보면 새로운 동네를 상징하는 문화주택이 들어서면서 구동네(빈민촌)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발생한다. 새 동네 사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누가 다가오는 것을 거절하고, 새 동네 아이들도 저희끼리만 어울리는, 이른바 주거공간이 계급에 따라 나누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광주대단지 역시 “숨통을 죄듯이 다닥다닥 붙은 20평 균일의 천변부락”인 단대리 시장 근처와 “100평 대지위에 세운 슬라브 집인 은행사택이 들어선 고급주택가”인 시청 뒷산이라는 ‘상반되는 두 지역’안에 존재했다. 광주대단지는 정부가 만들어 놓은 지옥인 '구빈원'과 다름이 없었다. 71년 광주대단지에 버려진 민중들의 모습은 너무 비참했다. 기아에 못이겨 임신부가 아이를 삶아먹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지만, 서울시는 대단지에 밀집한 인구에 대해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기막힌 발상을 했다. 당시 주민을 인터뷰한 자료를 보면, “서울 시내의 귀찮은 존재들인 무허가 주민들을 철거 이주시키자는 목적은 그대로 살아있고, 광주단지의 유보지를 팔아서 자원을 마련하는 계획 또한 그대로 살아있다”고 지적하며, 대단지 건설의 숨겨진 맥락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산업화 초기 서울시의 도시 빈민들에 대한 대책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무허가 건물의 양성화, 두 번째가 시민 아파트 건축 그리고 마지막이 정착지조성책이라고 불리는 ‘이주정책’이었다. 이 가운데 서울시가 가장 선호했던 것은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세 번째 안’이었다. 이런 악순환은 대단지를 포함해서 62년에서 7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총 20개 지구 4만 3,509가구분의 정착촌이 들어서게 되고, 그 결과 이주민의 공간적·사회적인 고립과 반강제적인 실업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대단지 사업이 발표되자 “서울 근교 광주대단지라는 곳에 가면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살 수가 있어 딱지 - 초기 시내 철로변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은 철도청장이 발행한 분양증을 가지고 대단지에 들어왔는데, 이를 ‘무딱지’라고 불렀다 - 라는 것을 사면 땅도 20평씩 얻을 수 있어, 좀 불편하지만 서울에서 출퇴근이 가능해”란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대규모 전매입주자들이 모였다. 초기에는 철거민이 광주대단지 입주자의 다수를 차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매입주자의 숫자가 급속하게 증가해서, 철거민을 초과했다. 1971년 조사에 따르면 대단지내 철거민 수가 41,596명인데, 전입자수는 68,623명에 달했으며. 직업 분포도를 보면, 자유노동이 52.2%, 상업이 20.1%, 서비스업이 7%의 순서였다.
이와 관련 주목해야 할 것이 정부가 ‘도시하층민 밀집 주거지=사회 불안 요소’로 생각한 점이다. 광주대단지 사건 직후 주모자 구속 등 강경 조치를 정권이 취했던 이유는 4.19 이후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존재했지만, 학생 시위의 연장이었지 도시하층민 등이 주도한 봉기적 형태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건 직전 정부 보고서(“광주대단지 철거민 현황, 문제점 및 대책”)를 보면 대단지 주민들에 대해 “식생활에 쪼들린 나머지 대부분의 주민들은 신경질적이며 저녁에 폭행 등 싸움이 많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국회 입법조사관의 한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 ... 유독 못사는 철거민만을 이주시키려고 하는 것은 합리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정책이 아닌가? 그 이유는 첫째, 못사는 다수의 민중을 한 곳에 결집시켜 놓으면 반란 세력을 구축하기 용이하고 폭동의 興起가 쉽다 ...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불량하고 불미스런 도시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구빈원 속에 던져진 도시하층민들은 위험 분자, 무지한 것들, 딱지 찾아 몰려든 주변인들로 여겨졌고, 아무런 도시 기반 시설이 없는 조건 아래에서 하루하루 분노를 삭이며 살아가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를 거쳐 이들은 정부를 향해 주먹을 들었는지 조금 더 나아가 살펴보도록 하자.
3. 분노의 십자가
1971년 총선을 즈음으로 해서 대단지의 투기·건설 붐은 ‘절정’에 달했다. 서울시가 3월에 실시한 대단지 유보지 매각 공개입찰에서 평당 최고 가격은 20만 9천원으로, 이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나 안국동, 통의동의 상업지구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비슷한 시기 철거민, 전매입주자 등 주민들은 ‘정말 낙원이 오는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70년 4월 서울시장에 임명된 양택식은 5월 18일 “광주대단지 개발계획”을 새로이 발표하고, 300만평을 매입·개발해서 5만 5천 가구 35만 명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자마자 환상을 ‘불만’으로 돌려놓는 조치들이 연달아 발표·집행되었다. 대표적이 것이 전매 금지 조치와 3년 상환이 아닌 일시불 상환 조치가 일방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이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불만이 쌓여가는 과정에서 전매권입주자 등을 중심으로 문제를 정부와 협상 또는 담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이들은 광주대단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제1공화국 시기 공보처장이었던 제일교회 전성천 목사를 찾아갔다. 이들은 그에게 현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전성천은 본인이 직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면서 제일교회 장로인 박진하를 대표로 내세우고, 자신을 고문으로 한 시정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한다. 대책위는 지역 내 11개 구역의 위원을 선정하고, 전성천 명의로 보낸 구두 사발통문(沙鉢通文)을 통해 “단지 내 각 반별로 유지 몇 명씩을 뽑아 7월 17일 오후에 제일교회로 모이라”고 알렸다. 실제 당일 아무런 약속이 없었음에도 불구, 100여명이 제일교회로 모였다.
이윽고 7월 19일 2,000명이 모인 가운데 ‘유지대회’가 개최되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여서 마이크를 통해 거리 ‘집회’가 열렸으며, 각 구마다 2명의 대표를 추가해 33인으로 위원회를 확대했다. 이를 통해 대책위는 정부 측에 자신들의 힘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동시에 ‘진정서’ 제출을 통해 대책위를 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할 것으로 요구했다. 당시 결의된 4개항의 요구 조건은 가격인하, 불하대금 10년 상환, 감세, 구호대책 등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서울시는 오히려 분양 가격을 8천원에서 만2천원으로 올려 받겠다고 통보했고,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데모에 돌입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전성천은 이를 진정시키고 23일 오후 합동대회를 통해 7월 31일까지 결의 내용이 관철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간다는 단서를 붙여 만5천 가구의 날인을 거쳐 가족서명으로 서울시장과 경기도 지사 앞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는 진정서에 대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사건이 경기도의 ‘취득세 납부 통지’였다. 8월 3일 대책위는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취득세 통지를 보고, 좀 더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도 “당국은 우리를 죽이려고 계획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전성천을 중심으로 확대 개편되어, 217명을 위원으로 하는 ‘투쟁위원회’로 변신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담긴 전단, 팜플렛 등을 집집마다 돌렸다. “백 원에 뺏은 땅 만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반대” 등이 그 내용이었다. 사태의 해결 방향이 보이지 않자 투쟁위원회는 초강수인 궐기대회를 8월 10일에 개최할 것을 결의하고, 대단지 곳곳에 현수막, 포스터와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是正) 대열에!”란 구호가 적힌 전단 3만을 도배하기에 이른다. 또 단지 골목골목 마다 “우리는 더 이상 속을 수 없다”, “대책을 세워 달라”는 등의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8월 10일. 궐기대회에는 최소 3만, 최대 6만에 이르는 대규모 인파로 넘쳐흘렀다. 집집마다 1명씩 나올 정도로 많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또 서울시장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몰려들었다. 이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주민궐기대회에 모여, 양택식 서울 시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사람들은 비장한 결심을 한 듯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으며, 저마다 한 손에는 피케트를, 다른 한 손에는 뭉둥이를 들고 있었고, 좌측 가슴에는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군중 구제하라”는 노란색 리본을 달았다. 당시 상황을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간간이 비가 내렸다. 성남출장소 뒤편 산비탈. 오전 9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녀가 뒤섞이고 어린애들도 눈에 띄었다. 10시가 지나자 발 딛을 틈이 없었다. 3만, 5만, 6만 ... 헤아릴 수가 없었다 ... 적잖은 사람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삽, 곡괭이, 몽둥이였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하는 각오였다. 군중 속에 스무살 쯤 돼 보이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바짝 마른 얼굴이었지만 눈빛에선 불이 타는 듯 했다. 분노에 찬 듯 악을 쓰는 목소리로 그가 구호를 외쳤다. "일자리를 달라!" 순식간에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이 날 누구랄 것도 없이 구호를 선창하면 모두들 따라 외쳤다 ...”
11시에도 기다리던 서울 시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주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감정,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가난한 자들은 국민으로도 보지 않는가에 대한 박탈감이 그들의 눈빛 속으로 전달되었다. 스피커로 30분만 더 기다리라는 사업소의 공지가 있었지만, 30분이 지나자 흥분한 청년들의 ‘나가자!’는 외침과 함께 사태는 봉기의 길로 내달았다. 주민들은 “속았다, 우리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다”며 분노를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성남사업소, 출장소, 관용차량, 소방차, 파출소의 파괴와 방화 등 공공연한 폭력을 행사했다. 또 이를 막기 위해 등장한 기동경비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 ... 출장소 본관 건물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불을 본 뒤 시위 군중의 흥분은 가열됐고 군중 수는 늘어났다. ‘죽여라’, ‘밟아 버려라’는 외침 속에 출장소 앞에 세워둔 서울 관 1-356 지프를 불태운 다음, 출장소에서 100미터 떨어진 서울시 파견대단지 사업소에 몰려갔으나 비로 인해 방화에는 실패, 사업소 앞에 있던 경기 관 7-492번 빈트럭을 불태워 탄리천에 밀어 넣었다 ... 이들 중 일부는 몽둥이를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택시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몇 끼니를 걸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팔자 좋게 택시만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 왜 도망가려하느냐”면서 모두 차에 내리게 했다 ...”
대단지 사건 과정에서 집계된 피해 내역을 대강 살펴보면, 1) 성남출장소 건물 1동 및 건물 내 서류 일체 전소, 2) 대단지내 유리창과 각종 기물 대파, 3) 차량 피해 22대(소실 4대, 시영버스 대파 5대·소파 13대), 4) 경찰 부상자 20여명, 주민 부상자 7명, 5) 경찰지서 파괴 등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평소에 반감을 지니던 관공서 - 경찰서, 사무소, 세무서 등 - 에 대해서는 무차별적 공격을 가했지만,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기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관에 대한 불만은 대단지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서도 기인했지만, 일상적으로 주민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이들의 ‘태도’에서도 기인했다. 첫날 검거된 카메라로 식별된 집합 폭력을 가한 사람들의 성격인데, 12명 가운데 16, 17세인 10대가 7명, 최고령이 33세에 불과했다. 바로 직접적 폭력 행동을 한 주도 층은 대책위나 투쟁위, 즉 전성천 주변과는 무관한 일반 주민이었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이들은 협상보다 뭔가 확실한 행동과 분노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의사 표현의 방식이 없는 상태였다.
마침내 궐기대회가 폭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주민들이 차량을 이용해 서울로 진출할 기미를 보이자, 양택식 서울 시장은 대표단과 협상에서 구호양곡 확보, 생활보호 자금, 도로포장, 공장 건설, 세금 비과제 면제 등을 합의하고 곧바로 시청에 들르지 않고 총리공관으로 가서 상황을 이미 기다리고 있던 오치성 내무,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보고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통지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밑으로부터 대중 봉기의 위험성을 잘 알고, 대단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박정희 자신이었다. 국가기록원에서 비밀해제된 1971년 8월 11일자 대통령에게 보고된 보고서(보고번호 제71-458호, 보고관 정종택)의 첫 페이지에는 박정희가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을 도시폭동으로 간주, “主動者를 嚴斷에 處하라”는 메모를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남로당을 통해 대중의 힘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서울 바로 위에 휴전선이 그어진 조건으로 미루어 볼 때 위험천만하다는 판단을 했을만 하다. 실제로 당시 진상보고서에는 민심수습 다음 조치로 “난동자에 대한 조치”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처럼 밑으로부터 대중정치의 위험을 인지했기 때문에, 정부는 시급히 서울시가 대단지 경영사업에서 손을 뗄 것으로 지시하고, 요구 조건을 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구의 수용이 자칫 ‘데모하면 관철된다’는, 즉 밑으로부터 대중정치 - “정치문제로 비화될 가능성” - 의 가능성에 대해 동시에 경계하는 입장을 보였다.
4. 28년의 세월과 광주대단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눈에 대단지 사건은 무지하고 가난한 자들의 일회적인 한풀이이며, 현대사에 기록될 필요성이 없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뉴라이트 진영의 대안교과서 조차도 간단하지만 대단지의 여파에 대해 다루고 있는 상황이다. 2002년에 이어 2008년에도 타오른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제 거리에서 대중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은 많이 변화했다. 대단지 사건 때처럼 뭉둥이를 드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고, 나의 선배들이나 대학 시절같이 불타는 화염병으로 거리의 정치가 채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깊지만, 거리의 정치에 대한 많은 이들의 편견은 여전하다. 얼마 전 나는 우연히 잘 몇 명의 보통 사람들을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술 자리에서 이야기가 돌다가 화제는 최근 최대 이슈인 촛불 시위로 옮아갔다. 술자리의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거리 시위에 대한 악감정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른 얘기를 듣게 되었다. “시내 온갖 노숙자들이 온통 촛불시위에서 우글거린다네 ...”. 나로서는 섬뜩한 동시에 무척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대중시위와 그 주체에 대한 시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대단지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아니 기억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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