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과학 연구와 서사성
근자에 들어 규범적인 장르인식을 넘어선 인터뷰, 르포, 평전, 에세이(수기), 대담 등 글쓰기가 활발하다. 특히 실험적이며 자기성찰적인 서사적 역사서술의 방식으로 인터뷰, 르포, 수기나 자서전 등이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 이들을 둘러싼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과 별도로, 사회과학 연구에서 서사적 사료에 대한 시각은 어떠한가? 전반적으로 사회과학의 문학, 증언, 인터뷰 그리고 수기 등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부정적'이다. 더 나아가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는 분과학문의 서사적 사료를 다루는 문학 간의 '거리'는 매우 깊다.
역사학 등 인문학도 상당히 유사하지만, 사실(fact)은 문자로 구성된 문헌을 통해 분석, 검증이 가능하다는 경험과학으로서 성격은 객관성과 대표성 등을 강조한다. 이런 인식은 개인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이나 평가에 기초한 사료에 대해 불신을 제기하기 쉽다. 흔히 민족, 국가, 계급 등 ‘대주체’란 기본적인 분석 범주로부터 일탈된 분석 대상을 다룬다는 것은 과학성-객관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90년대 중반 필자는 당시만해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인터뷰-면접 - 이른바 질적연구방법 혹은 구술사 - 을 통해 논문을 구성했다. 80년대 대학문화와 학생회나 학생운동을 경험했던 10여명에 대한 심층인터뷰를 통해 문화와 정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1) 이제 1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당시 구술 사료에 대한 반응은 '그런 게 논문이 되나?', '어디까지나 보완적 자료지' 등 반응이었다.
각설하고 90년대 중반만 해도 사회과학 연구에서 증언, 수기, 르포, 구술, 자서전 등은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문헌에서 부족한 사실을 보완하기 위한 2차적인 보조 자료로 사용되었다. 사회현상을 다루는 사회과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구술 등 서사적 텍스트가 생산되는 과정을 둘러싼 문제가 존재했다. 80년대 후반 이후 생산된 구술, 수기, 증언 텍스트는 생산자 개인의 기억에 초점이 두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공 이데올로기 하에서 감추어졌던 역사적 사실을 확인, 복원하기 위한 목적이 1차적이었다.2) 더불어 이는 레드컴플렉스를 깨트리기 위한 폭로, 공식적 역사에 대한 반정립이란 목적의식이 강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목적성은 사료로서 객관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한편 한국 사회과학이 지닌 이론적 지향도 서사적 텍스트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가로 막는 또 다른 원인이었다. 한국 사회과학은 이론 지향성을 지녀왔으며, 이는 구조적 역사에 대한 강한 천착에서 기인했다. 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과학은 근대화론-구조기능주의라는 단선론적이고 체제통합적 이론 패러다임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른바 시스템의 순조롭고 조화로운 운영을 위한 '사회과학'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70년대 초보적으로 민중론과 비판적 정치경제학이 소수 연구자에게 전유되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 사회구성체-사회성격 논쟁이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사회과학의 비판적 성격의 본원은 근본적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인간 주체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었다. 사회관계, 국가성격, 계급구조 등에 대한 천착이 지니는 의미가 존재했지만, 이는 주체, 타자, 경험, 감수성 등 영역이나 범주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이 부족한 결과를 낳았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구조 분석이 인간의 감정구조를 대치할 수는 없었으며, 80년대 비판적 사회과학이 지닌 근본주의적 성격에도 불구,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는 등한시 했다. 이러한 80년대 사회과학의 한계는 이론 지향적 성격과 결합되어, 지적 폭력성이나 동원이나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기도 했다.
끝으로, 서사적 사료들 자체가 탐구의 대상이 되기보다 특정한 목적을 위한 합리화-정당화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후술하겠지만 르포, 수기 등 자체가 지닌 사료적 가치와 한계에 대한 논박이 이루어지기보다, 특정한 목적 - 단적인 예로 운동의 정당화 등 - 을 위해 사료가 윤색되거나, 특정 입장만이 강조되는 것이 그러한 경향이었다. 서사적 사료가 지닌 개인성과 주관성이란 특성은 사라진 채 공동의 목적을 위한 '공식적 이야기'(official narrative)로 동원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것이 '공식적 역사-담론'으로 고착되곤 했다. 이처럼 서사적 사료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드문 일이었다.
2. 1970년대와 80년대 서사적 사료들 : 노동 문제 관련 사료들을 중심으로
인터뷰, 르포, 평전, 에세이(수기), 대담 등 자료가 생산되기 시작했던 것은 70년대였다. 70년대 생산된 자료들의 경우 정권이나 자의적인 권력 행사에 의해 피해를 받았지만 자기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없는 개인이나 집단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이자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자기 기록을 지니기 어려운 주체들의 목소리를 텍스트화해왔다. 70년대 신동아, 대화 등에 실린 르포문학, 자전적 수기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3) 그 외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석정남과 유동우 등 노동운동 관계자들이 자신의 삶을 쓴 자전적 수기와 평전 등 70년대 당대 노동현실을 드러내는 자료들은 한편 노동현실을 둘러싼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해준 동시에, 노동운동에 대해 고민하는 개인들을 의식화시키는 중요한 기제였다.4)
한편 80년대에 들어서 70년대와 다른 결을 지닌 서사적 자료들이 생산되었다.5) 대표적인 것이 70년대 7-8개 존재했던 민주노조운동 관련 '집단전기'와 ‘수기’(手記)였다. 이 수기들의 형태는 민주노조에 참여했던 노동자의 개인 수기, 노조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공식적인 민주노조 수기, 정기간행물에 실린 노동자의 수기 등 다양했다. 이들 수기들은 산업화 시기 한국 기층사회와 노동자들의 세계관을 둘러싼 많은 정보와 상이한 시각들을 제공해주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산업화 시기 노동자들의 수기와 노동조합 자료들은 일종의 ‘집단전기’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들 서사적 자료들은 대부분 198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는데, 이들 텍스트가 생산된 목적은 1980년대 노동운동이 지향했던 ‘변혁지향성’이라는 목적을 전파하기 위해 씌어졌다. 1980년대 중반 정치적 노동운동 및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격을 둘러싼 평가가 엇갈렸던 것으로 미루어, 1980년대 노동운동의 ‘반면교사’로서 노조운동을 상정하고, 1970년대 노조운동 및 주변 상황 가운데 특정한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임의적로 수기가 작성된 면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의 논리에 따라 출생(혹은 노조 결성)에서 노동자가 되는 과정, 노조 만들기, 투쟁의 전개 과정 및 의식의 흐름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서노련에 대한 기록인 <선봉에 서서>나 노동자 수기, 증언, 르포 자료들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담론으로서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6) 물론 수기와 자료들은 권위주의 하에서 금지된 기록과 사실을 폭로하고 공개화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록이며, 이들이 모두 윤색/조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안 및 논쟁에 대해서는 자기변호, 은폐, 생략 및 누락, 국부적 사실로 처리하거나 혹은 특정한 부분의 의도적 부각 등이 여러 곳에 드러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데;
먼저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엮음(1985),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돌베개의 경우 동일방직 해고자 투쟁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전지부장 이총각 등을 중심으로 펴낸 노동조합사이다. 초기 노조 결성에서 해고 과정에 이르기 까지 일목요연하게 사건 발생순서대로 정리되어있고 조합원들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자료에 대해서 도시산업선교회 등 일각에서 비판이 존재했으며 조합원들 사이에도 누락된 부분과 평가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형적인 민주/어용 구도에 입각해서 동일방직투쟁을 여성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만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도시산업선교회 및 동일방직 노조에 개입한 외부 세력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누락되어 있다. 그 외에 순점순(1984). ������8시간 노동을 위하여: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기록������, 풀빛은 1979년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을 전개했던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투쟁사다. 전체 기록의 1/3정도를 차지하는 남성노동자와 사측에 의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폭력, 테러, 협박 과정이 적나라하게 반복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여성노동자 개인의 문제의식 발전 경로에 따라 작성된 것이라기보다 투쟁의 전개과정을 사실에 가깝게 ‘폭로’한 선전물 같은 성격의 글이다. 특히 개별노동자의 경험이나 입직에서 노조 가입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기보다 사측이 남성 노동자를 이용, 민주노조운동을 얼마나 심하게 탄압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씌여진 듯 한 느낌이 많이 드는 글이다.
이상에서 몇 가지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개인적, 집단적 수기와 자서전 등이 지닌 목적성,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 노동운동 내 사실에 대한 해석이 강했던 점이 이들 서사적 사료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되돌이켜보면, 이러한 문제는 서사적 사료의 생산과 성격 자체로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주관성과 개인의 경험이 강하게 묻어나는 이들 자료를 바라보는 방법론, 인식론적 입장들을 둘러싼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기, 자서전, 일기 등 서사적 사료들은 1차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과연 망각된 혹은 사라진 사실의 복원일까? 혹은 서사적 텍스트를 생산하는 서술자의 기억이나 목소리는 어느 정도 진실된 것일까?
일단 확인해야 할 지점은 서사적 텍스트를 독해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공식 역사나 사료에서 누락되거나 소거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서사적 텍스트는 감추어진 사실을 드러내 주기도 하지만, 역으로 특정한 사실을 감추거나 과장해 주기도 한다. 단적인 사례로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주요 인물인 전성천은 그의 자서전에서 대단지 사건에서 본인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성천은 초기 조직화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주도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예기치 못한 대중들의 분노에 공포를 감지하기도 했다.
“ ... 더 단적으로 말해서 이들(광주도시빈민-인용자주)의 흥분이 없었던 들 우리의 요구가 이렇게 빨리 관철되었겠느냐 하는 문제와 이왕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라면 일이 터지기 전에 왜 들어주지 못하고 뒤늦게 처리해서 불상사를 자아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7)
이처럼 서사적 사료가 이야기하는 과거는 '현재와 연관된 과거'이다. 다시 말해서 화자의 현재와 연관된 과거를 둘러싼 개인적 의미에 대해 '해석'하는 또 다른 역사 텍스트이다. 단지 과거에 내가 '이러 이러한 일들을 했다'가 아니라, '과거에 내가 한 일이나 겪은 사건이 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주관적 해석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 바로 '서술자 자신의 해석한 자신의 경험한 사건과 역사'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 공식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 해방, 한국전쟁, 4.19, 삼선개헌, 유신, 10.26, 광주항쟁, 민주화운동, 올림픽 등이 다수 개인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올까? 마을에서 전쟁과 농지개혁을 경험한 필부(匹夫)에게 전쟁은 분단이라기보다, 생존이나 사회적 평준화란 의미로 다가올 수 있으며, 종가집 종부에게는 이들 거대 사건보다 문중의 제사와 가족사가 휠씬 중요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사적 사료는 공식적 역사와 다른 결을 지닌 주체의 역사를 다루는 '다른 종류의 연표'를 작성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는 박현채가 남긴 어린 시절 빨치산 경험에 대한 유고(遺稿)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빨치산은 전투적이고 개인적인 고뇌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당시 박현채는 과도기적이고 해방구 사수조차 ‘어려운 시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이 시기는 모든 면에서 과도기적인 상황이었으므로 대원들의 행동 또한 과도기적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동료들의 태도는 비위에 어긋났고 그 과정에서 우리를 분격케 했다. 해만 떨어지면 많은 동지들이 서로를 피해 산 구석에 앉아 눈물을 쏟으며 훌쩍이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나는 그런 것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자리를 만나면 서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일상적인 관행으로 되었다. 나는 그런 행위가 죽음을 회피하거나 운명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한 적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를 지적해서 논의를 제기했었다. 조국을 위한 의무를 수행하다가 죽음에 직면한다면 그것 앞에 서슴없이 기쁜 마음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그와 같은 태도는 그들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 싸우는 길이고 우리가 사는 길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시기 나는 많은 동료들의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많은 동료들의 죽음과 변신 속에서 해결되어 갔다...".8)
이처럼 서사적 사료들은 개인이나 집단의 서사성을 구현한 또 다른 장르의 역사서술이다. 그리고 특히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개인과 집단이 자신들의 과거를 기록한 '그들의 역사해석'이다. 다만 수기, 자서전, 르포 등의 한계는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층이 주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70년대에 석정남이나 유동우 등 예외적 경우가 있지만,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수기, 자서전 등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공식적 역사와 개인의 역사 간의 간극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많은 장애 요인이다. '왜 문자가 없는 개인들은 침묵해야만 하는지' 혹은 '지식인에 의해 여과된 혹은 선별된 기억의 형태로만 이들의 기억은 존재해야 하는지' 등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문자를 지니지 못한 이들을 위해 제안되어 온 것이 '구술생애사'와 '자기역사쓰기'이다.
3. 대안적 서사적 사료 : 구술생애사와 자기역사쓰기
흔히 구술사라고 불리는 구술생애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모두에 말했지만 90년대 중반까지도 인정되지 않던 구술사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를 경과하며, 학계와 각종 민주화운동및 과거사 진상 규명 과정, 연구자들의 구술사 연구 등 에서 기억의 재현이란 측면에서 활용되었다.9) 심지어 2009년에는 한국학진흥을 위한 연구사업 가운데 구술사 연구에 매년 10억 원이 지원될 예정일 정도로 급속하게 주목을 받고 있다.
구술생애사는 제대로 기억을 구현하지 못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서사를 재현함으로써 이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역사서술 방법이자, 대안적 역사서술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서사적 사료의 주관성, 개인성 등 쟁점뿐만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서사를 생산하는 구술자와 구술을 텍스트화시키는 양자 간 관계다. 연구자는 지식, 기술, 문화적 자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록을 지닌 구술자보다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기억의 망각을 강요당하거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개인 - 예를 들어서 일본군 성노예 여성,전쟁 국가폭력 피해자 등 다양한 소수자 - 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재현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연구자는 지속적인 신뢰와 대화 과정에서 연구자는 구술자가 처한 현실, 문화전통에 기반한 인식세계, 현재 사회·경제적인 조건, 구술 진행 당시 상황 등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구술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를 이루는 틀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는 구술자의 ‘정신세계’의 심층을 두텁게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구술사의 윤리적, 방법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자기역사쓰기'가 강조되고 있다. 자기역사쓰기는 연구자나 구술을 조직하는 면담자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기억을 망각해온 주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자기역사쓰기이다. 최초로 이를 정리한 정경원은, “... 누구나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며 이것이 자기역사 쓰기다. 노동자가 자기 역사를 쓸 때는 자전적 역사이므로 주관적 관점을 가지고 쓰면 된다. 그 주관성이 개인 역사 쓰기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 기록을 통해 자기성찰의 과정을 밟는 것이 곧 역사쓰기의 시작이다 ...”라고 주관적인 자기역사 서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10)
자기역사쓰기는 기존 구술사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자기역사쓰기는 기지촌 여성, 국가폭력의 피해자 등 침묵을 강요당한 주체들의 다양한 삶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피해자로만 인식하는 한계,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 과도한 고통,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연민’(sympathy)을 강화시킬 뿐, 이를 ‘자기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연민이 아닌 ‘공감’(empathy) - ‘공감’이란 자기 자신과 연관되지 못한 문제에 대해 자기 감성을 개입시켜 ‘자기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 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위한 자기역사쓰기의 윤리, 인식론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
구술생애사나 자기역사쓰기 모두 일반성을 위해 특수성을 희생하거나, 특수한 것의 독특함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하는 개인과 집단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일반화 과정 속에서 타자의 개별적 가치는 사상되기 쉽다. 바로 역사서술에서 다른 차원의 ‘공감’(empathy)이 요청되는 것이다. 근대역사학은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것의 서술을 역사서술로 규정했다. 구술과 자기역사쓰기 역시 객관적인 것과 실증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공감의 과정을 거쳐 대화와 상대의 치유라는 방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역사서술을 넘어 '치유와 공감의 교육학'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미 자기역사쓰기는 노동자역사 한내, 삶/창, 인문학 사회교육 등을 통해 초보적인 걸음마를 떼고 있다. 교육과 치유 그리고 공감을 동반하는 교육, 글쓰기 작업을 통한 작업은 지적 차이의 평등화를 확산시키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회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다. 역사 속에서 침묵하는 타자나 비정상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나 직업교육 등이 아니라, 스스로의 위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비판적인 인문학의 힘’, 바로 인문학적 성찰력이 아닌가 싶다. 자기역사 쓰기는 저명인사들이 쓰는 자서전이 아닌, 침묵을 강요받던 이들이 정치적인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인 성찰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이들을 공적인 세계로 진입시키는 효과적인 방법론이다.
결국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자기역사쓰기란 새로이 발견한 역사적 사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대 지배적 역사 서술의 페러다임을 거슬러 갈 때, '다른 역사 서술'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서사적 텍스트들을 생산하는 힘은 여전히 큰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