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들의 목소리가 세상과 불화하기를 바란다
1년여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금 현재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슴이 얼음으로 된 작살로 깊이 꽂인 것처럼 서늘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주류 삶과는 너무 다른 맨 밑 바닥 저층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는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온 힘을 다해서 낸 '외침 혹은 절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서문 쓰기를 망설였다.
이 세상이 그분들의 목소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절규와 지혜'를 헤아릴 최소한의 겸손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나는 지독히 회의한다.
이런 세상에 그분들의 목소리를 내보낸다는 것은 위험스런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거대 자본이 대다수 국민들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면서도 절대적으로 숭배되는 나라,
'돈만이 미래'가 될 수밖에 없는 곳에서 세상은 좋아졌다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시대,
또 그것을 믿고 사는 일부 시민들의 허위의식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분들의 목소리는 한낱 넋두리로 버려지거나 냉소, 경멸당할 수 있었다.
그 못소리들은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의 목소리가 이 세싱과 많이 불화하길 바란다.
몸으로 인생을 통화해오면서 얻은 육화된 그분들의 언어와 삶이
실종된 세상의 가벼움과 최대한 많이 충돌하기를 원한다.
그분들의 목소리를 불편해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분들의 언어를 쉽게 읽지 않는 것,
그것이 세상이 그분들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 말은 그분들의 고통이 이미지 속 이라크전쟁처럼
게임으로 즐겨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퓨전 음식처럼 여러 음식 중에 하나로 선택해서 즐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기를 바란다.
값비싸고 좋은 음식만을 먹다가 어느 날 먹는 된장찌게가 아니기를 바란다.
가볍게 살고 있는 자신의 허무한 마음을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생의 하중을 견뎌오면서 만들어진 그분들의 얼음작살같은 목소리가 될 수 있으면
마음에 오래 오래 박혀서 많이 아파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영혼이 없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외롭지 않기를,
존재와 이미지로 분열된 현대적인 자아,
그대 당신이 그분들의 생생한 언어로 '허위의 삶'을 깨고 치유되었으면 한다.
물처럼 가득 찬 고통, 그것은 '사회적 고통'이었다.
추웠다. 벼 밑동만 남은 초겨울 전라남도 담양 넓은 들판에서 추워서 몸이 자꾸 떨렸다.
그 전날,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살다가 개에게 물려서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 때문인가,
그 아이가 나를, 세상을 절대 용서하지 않기를 빌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영섭이 아저씨도 떨고 있었다.
그도 비날하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보일러 기름값이 너무 비싸 겨울에는 집에서 지낼 수 없어
산에서 나무를 해 와 난로에 불을 때면서 비닐하우스에서 지냈다.
오랜 시간 태양을 먹어 오디처럼 검어진 그의 얼굴에는 밭고랑처럼 주름이 깊게 놓여 있었다.
그가 만졌을 흙의 양을 생각했다.
그가 발 딛고 있는 넓은 들판만큼은 될까.
그 흙 속에서 기워온 쌀과 상추와 딸기의 양도 생각했다.
다 쌓아놓으면 63빌딩보다 더 높을 것 같았다.
"이제 농새해서 먹고 살기는 글렀어."
남의 일처럼 무심히 말하는 사이로 저녁을 부르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정부의 쌀농사 포기' 선언과 아저씨의 운명,
세계화 시대에서 농업을 사양산업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생존 차원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충돌,
나는 하릴없이 아저씨의 몸이 흙으로 보였다.
흙이 닳고 닳아 시간만 남았다.
그 시간마저 사라지면서 아저씨 몸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살아있는 아저씨 몸에서 죽음이 느껴졌다.
그 차가운 쓸쓸함이 뼛속까지 전해져 진정이 안 되었다.
울산 태화강에서 달빛을 보았다.
밤 10시 태화강의 습기를 머금은 달이 현대 자동차 공장 안을 넓게 비추고 있었다.
덕인 씨는 단식을 하고 있었다.
35일째였다.
"그 전날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그 다음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해고했어요."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상복을 보고 있었다.
서른이 갓 넘은 젊은 그녀의 몸과 하얀 상복은 참 잘 어울렸다.
그것이 낯설게 어긋나면서 자꾸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일은 하루에 14~15시간 하는데 시급이 아르바이트생보다 더 적은 2,900원이에요."
파견법이 도입된 뒤로 하청업체가 많이 늘어나면서 일을 해도 해도
임금은 낮아지는 이상한 구조가 정착된 사회 속에 그녀는 살고 있었다.
파견법과 덕인 씨의 운명, 젊은 근의 몸에서 모래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모래가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자꾸 덮고 있었다.
9월 초였는데도 사막의 밤처럼 몹시 추웠다.
그 추위 속에 그녀가 단식을 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하청노동자 류기혁씨가 목을 맸다.
90%가 비정규직인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도 모래 서걱이는 소리가 나고,
남대문 공원에서 잠을 자는 노숙인들에게도 모래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들의 삶을 버티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은 내려갈 대로 내려가 가장 낮은 음계인 죽음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분들의 삶은 물처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사회는 너무 조용하고 무감각했다.
차라리 그 고통들이 전쟁이나 강제이주, 해일로 왔다면
뭔가가 좀 더 뚜렷해지고 해결점이 명확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온갖 합법적인 것, 도덕적인 것, 능력 있는 것'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왔다.
그것이 '자본의 전쟁인 세계화'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본의 전쟁인 세계화는
습기처럼 조금씩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황폐화시키고 있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며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미묘하다.
그 세게화의 구체적인 모습은 IMF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왔고
우리는 그 이후의 삶을 솔직하고 냉철하게 스스로 물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1998년 이후 7~8년간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변화로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
이것은 우리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삶의 고통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 임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삶들 중에서도 우리는 비정규직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비정규직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전쟁인 '세계화'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임과 동시에
기존 삶의 밑바닥을 흔들면서 우리들의 존재조건을 바꾸어 버린 한 부분이다.
850만 명이라는 숫자와 그들과 생계를 같이 하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
이제 일부 극소수 계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비정규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규직 노동자든, 학생이든,
예술가든, 가정주부든, 영화배우든,
고급 인텔리 기술자든, 불안하고 불안정한 삶이 상시화되고 내일을 꿈꿀 수 없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인생이 번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은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직업 형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시선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삶을 기록했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