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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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은 상실의 아픔을 주지만 시간이 흐르면 부재의 허전함이 더 큰 것 같다. 오늘은 홍콩배우 장국영이 죽은 날이라고 한다. 그는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리고 나는 20년전 어느 봄날, 거짓말처럼 죽은 또 한 명의 사내를 떠올린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 집>

기형도. 그는 종로의 한 극장에서 프랑스 시인 '시라노'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죽었다. 10대 후반이었던 나에게 그의 시는 참 난해하였고 나는 그의 시편에서 한참을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에 해설을 쓴 김현은 그를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라 말한다. 누가 그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고도 했다. 그리고 당대의 평론가 김현도 바로 다음 해 운명을 달리했다. 김현이 죽은 날 나도 술을 꽤나 마셨던 기억이 난다.      

너 죽은 날 밤 
차 간신 몰고 집에 돌아와 
술 퍼마시고 쓰러져 잤다. 
아들의 방.  
아들이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화장실에서처럼 
소변보고 있었다. 
태연히. 
그리곤 방을 나가 
화장실에 누웠다.  
태연히. 

- 황동규 <너 죽은 날 태연히-같이 술 마시던 시절 김현에게> 

상가집을 지키다보면 문상을 하는 어르신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어떤 품위가 느껴진다. 삶에서 오래 버텼고 그만큼 죽음과 오래 대면한 결과 얻게 되는 목숨의 고독과 같은 것이리라. 나는 아직 충분히 늙지 못해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서툴다. 문상을 할 때마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황망스럽다. 그래서 이렇게 남이 쓴 글줄로나 문상을 대신한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더냐." (원효의 게송)
 
- 김훈의 기형도 추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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