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 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詩 김경미



henri matisse - 붉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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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9-1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들이 요즘 이러니까...수필가들은 밥 굶은 게야...암..

icaru 2005-09-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방...맘에 들어요...
잘 닦은 빈 와인잔도 좋고..

근데 이 시...읽어보니... 물망초가 생각나는 시네요..

비로그인 2005-09-1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저런 붉은 빛깔 남방 함 입어봤음 좋겠어요..(플레져님댁에서두 남방 열혈마니아 모드로..)

플레져 2005-09-12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수필가들도 시를 쓴다면...흠...
이카루님, 나두 저 붉은방이 넘 좋아요. 마티스의 붉은방이 저거 말고도 또 몇 편 있는데....어디있더라... 암튼 잊지 않고 있다가 찾아서 올릴게요 ^^
복돌님, 어떤 여자애는 남방을 난방이라고 써서 늘 저를 헷갈리게 했었어요. 붉은 빛깔 남방 뿐만 아니라 모든 색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

여울이 2005-09-1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신경숙의 모음시집 <내 마음의 빈집 한 채>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신경숙 소설가의 취향답게 감성적인 시들이 많았죠. 제 취향하고도 맞았던 것 같은데.... '비망록'은 유난히 가슴을 치던 시입니다. 뭐랄까? 24살 그 즈음에 겪었던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도 한, 발이 제대로 땅에 닿은 것 같지 않은 감정들이 느껴진달까요...

icaru 2005-09-1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럼..마티스네 방도 구경하러 다시 오갔어요!!

검둥개 2005-09-1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가 그 안도현 시인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었던 그 신춘문예 당선작이 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 (이런, 야사에 강한 모습 같으니라고 =3=3=3)

플레져 2005-09-12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보리밭님, 스물 네살이 아닌 이 가슴도 치고 가는 김경미 시인의 시를 좋아해요 ^^
이카루님, 그러슈!
검둥개님, 네 맞아요. 야사를 더 들려주세요...ㅎ

검둥개 2005-09-1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다 아시면서 =3=3=3

잉크냄새 2005-09-1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날같이 살고 싶었던 한철....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은 한동안 저의 MSN 아이디였습니다.

플레져 2005-09-13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
잉크냄새님, 그렇게 멋진 아이디를!! 전 msn 안해서 친구 목록이 다 사라졌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