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섬진강이 보고싶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봄을 보냈던 날이. 그게 언제였더라. 4월과 함께 병원 출입을 하면서 문득 떠오른 섬진강. 한번도 가본적 없는 강. 바다를 보고 싶었던 적은 있지만 강을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없었기때문에 '문득' 떠오른 섬진강에 괜한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깊이 생각해보면 섬진강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착각만이 있다. 몇 년 전 노량진에서 혼자 살던 선배 언니네 작은 방 책꽂이에는 파니핑크 비디오와 함께 이생진의 <그리운 성산포> 가 꽂혀있었다. 들쑥날쑥한 책꽂이에 꽂혀있던 그 푸른색 책등. 성산포가 섬진강으로 바뀐 이유는 단순한 착각일 터, 착각이 섬진강에 가고 싶은 바람이 되었다.
섬진강을 검색하다 섬진강이 있는 곳이 곡성이며, 곡성에는 <섬진강 기차마을> 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곡성 관광청에 신청해서 지도를 우편으로 받아보았고 남편은 대전에서 곡성으로 가는 빠른 길을 검색했다. 지난 주말, 생일을 보낸 다음날, 섬진강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곡성, 에 관한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새학기. 어깨까지 내려온 부스스한 머리의 한 여자아이가 우리반에 전학을 왔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자기 소개를 하라 했고, 그 아이는 가방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바닥을 보며 입을 떼었다. "저는 전남 곡성에서 온 *귀녀 입니다... " 그 아이의 성이 황씨였는지 오씨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아이의 부스스했던 머리만큼은, 풀죽은 눈빛과 새빨간 가방 어깨끈 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 처음 '곡성'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이렇게 먼 곳에서 서울에 왔겠구나 싶어서 조금 센치해졌다. 단거리 달리기보다 마라톤이 더 조마조마한 것처럼.
곡성에 가기 전 남원을 거쳤다. 춘향전 등장인물들이 남원의 간판마다 살아있었다. 춘향택배회사 부터 식당까지. 남원은 진입로부터 쭈욱 춘향이로 통했다. 다시 오기도 힘들터이니 광한루에 들렀다. 춘향이 아니라 팥쥐가 그네를 타고 있었어도 반하지 않았을까. 사랑은 바람처럼 느껴야 하고 바람처럼 사랑은 마음으로 스며든다. 때이른 초여름 날씨를 무색하게 할 만큼 광한루는 시원했다. 핏빛으로 보이는 저 붉은 철쭉은 좀 섬뜩했다. 몸이 아프니 마음이 금세 지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질투는 시도때도 없이 삐죽거린다.
남원에서 놀고 간 탓에 곡성에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증기기관차는 이미 매진이라 탈 수 없었다. 그래도 기적 소리는 실컷 들었다. 참 잘생긴 증기기관차.
곡성역과 나란한 영화 세트장에 들렀다. 가게와 가게 사이의 통로, 좁은 골목. 어린 아이들이 줄지어 지나갈 수 있는 좁디 좁은 골목에서 소꿉놀이 한 판 하고 싶다. 더워서 머리를 올렸더니 순천옥에 출근하는 분위기다. 호호.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소홀했던 내 몸을 좀 더 보듬고, 단련시키고 싶다. 너무 아껴서 약해진 것은 아닐까 싶은. 너무 몰라서 약해진 내 부실한 몸. 부디 이 봄이 잘 지나가기를 바란다. 욕심이 아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