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전화는 며칠전 아침에 걸려왔다.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J는 엄마와 먼저 통화를 했고 엄마는 J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고. 이십년 정도 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J가 회상하는 나에 관한 인상은 조금 우쭐하게도 만들었는데 압권인 것은 '공부 잘하는 누나' 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는 여러가지 설명이 따라붙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공부밖에 몰랐던 누나, 라는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는 지금 누굴 얘기하는거지? 그 누나가 나 맞아? J가 회상하는 공부밖에 몰랐던 누나, 가 과연 나일까?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정말 공부를 잘했어?' J에게 중독된 것일까. 엄마는 서슴없었다. '그으럼~' 아.뿔.싸.

J는 외삼촌 아들이다. 엄마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다. 내게는 외삼촌. 두 분의 외삼촌과 우리 엄마는 같은 해에 각각 아이를 낳았다. 엄마에게는 막내딸이고, 큰 외삼촌에게는 둘째딸, 막내 외삼촌에게는 장남. 나는 4월생, 큰외삼촌 딸은 8월생, 막내 외삼촌 아들은 10월생. J는 막내 외삼촌의 장남, 문제의 J다.

막내 외삼촌은 아이들의 장래와 노후를 위해 서울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셨다. 드문드문 엄마와는 연락을 했지만 외삼촌네가 서울에 나오지 않는한 우리가 외삼촌이 떠난 나라로 가지 않는 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이민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J의 학업성적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J는 나에게 과외를 받은 적도 있다. 외고 입시를 앞두고 있던 나는 J도 외고 시험을 보겠다고 나섰다. 말 그대로 동갑내기 과외하기. 지금 나를 부르는 호칭은 자연스레 '누나' 였지만 그당시엔 절대 누나라고 부른 적 없으며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테이블 앞에서 내가 푸는 수학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테이블을 팔꿈치로 누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J는 시험을 앞두고 보름간 우리 집에 수학책을 들고 왔다. 내가 수학을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J보다는 조금 공부를 잘했다는 것때문에 외숙모는 과외를 부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존심이 상할만한 일인데도 J는 매일 낮 12시면 참고서를 짊어지고 우리 집에 왔다. 어린 시절에 한동네 살며 어울린 적도 있었지만 J와 특별한 추억은 없었다. 어른들이 J를 놀리려고 나와 큰외삼촌 딸에게 '누나' 라 부르라고 재촉한 정도? 돌이 지났을 무렵 우리집 마루에서 세아기가 바둥거리는 사진이 한장 있다. 나는 두 아이들보다 꽤 큰 축이었으며 남자 아이 같았지만 -_- J는 아기다운 아기였다. 귀여웠다는 뜻.

그런 J가 타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고 곧 결혼을 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J는 씩씩한 음성이었다. 영어 발음이 섞여 있긴 했지만 '누나, 내 아내 보여줄게요' 라고 할 때는 내 아들의 며느릿감을 보는 것처럼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말미에 J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난 누나가 그런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나, 정말 공부 열심히 했잖아. 누나 보고싶어요' 아마도 나를, 공부 잘 했다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J밖에 없을 거다.

J와 전화를 끊고 토마토 주스를 만들었다. 다 갈리지 않은 알갱이가 입 속으로 스며들때마다 나는 J의 말을 곱씹었다. 가장 초라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J는 늘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내가 하는 일에 건투를 빌어주었다. 내가 보내는 이 순간은 가장 초라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열심히 살고 있었던 것이다. J에게 남아있는 내 인상기를 떠올리며 나는 나를 한 발자국 멀리 떨어뜨려놓고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죽을맛인 내 인생인데, 남들에게는 내 인생이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은 처음 보는 보석처럼 놀라웠다. 가끔은 남의 인생을 보듯 내 인생을 투영해보기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내 인생 내가 산다고 해서 내 인생을 내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지 않나.

J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J가 생각하고 있던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던 누나로 남고 싶다. 그 누나는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마땅히 지금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어떤 날은 다른 사람의 추억을 아름답게 해 줄 의무로 살아가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피에쑤 :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다. 공부를 잘 해보려고는... 했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05-22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비슷한 나의 또래...친척....우등하다면 모르겠지만 열등했다면....
참으로 스트레스입니다...제가 바로 그 열등의 진원지였었다죠...
(사실 그 녀석이 워낙에 우등했기에...S대 4년 장학생을 무슨 수로 눌러요..~)

플레져 2007-05-22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메피스토씨에게도 그런 사촌이 있군요 ㅎㅎ
뭐. 저는 그런 정도는 아녀요. J가 저를 잘 봐준 덕이니까요 ㅋㅋ

nemuko 2007-05-2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제게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네요. 또 뭉클해져서 갑니다^^

플레져 2007-05-22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무코님, 홧팅 한 번 해요. 홧팅!

날개 2007-05-22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언니의 둘째인 세희가 성재랑 동갑이어요.. 4개월 빠른..^^
둘이서 어찌나 경쟁을 하고, 어찌나 싸우는지... 글쎼, 말 한마디도 곱게 안넘어가더라구요.. 언젠가 성재는 세희를 누나라고 부르라는 어른들의 놀림에 울고 말더군요..ㅎㅎㅎ
나중에 이 둘도 어른되면 서로 위해주고 이쁜 기억들을 간직해 줄려는지....^^

홍수맘 2007-05-23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가 나를 기억해주는 누군가를 찾고 싶어져요.
님, 홧팅 하세요. ^ ^.

2007-05-23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7-05-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성재가 은근 스트레스 받겠어요. 어른들의 그 놀림... 성재 입장에서는 참 자존심 상하는 일일거에요. 부디 성재와 세희가 사이좋은 사촌이 되기를 바래요. (그 미운정이 새록새록한 정으로 변신해 있을 것 같아요. 대학생쯤 되면... 친하게 지낼걸요? ^^)


홍수맘님,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거에요.
홧팅하셨죠! ^^


속삭님, 음. 역시 님도 그랬을거라 생각해요 ㅎㅎ
그 기억이 맞을거에요. 지금도 그렇잖우 ^^

책읽는나무 2007-05-2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나는 내인생이 왜 이렇나? 자책하기 바쁠때 누군가는 너의 삶은 여유롭고 멋져보인다라는 말을 들었을적에 정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더라구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생각도 들구요..백 번 공감입니다.
그리고 동갑끼리 서로 존경할 수 있다라는 것은 예사롭지 않아요.님의 글을 읽으면서 울쌍둥이들을 생각했습니다.서로 존경할 수 있는 사이가 될지? 글쎄요~~ㅋㅋ
그나저나 지윤이는 왜 매번 님의 댓글을 달적마다 방해를 하는지~~
ㅠ.ㅠ 그래도 오늘은 올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플레져 2007-05-2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덕분에 제가 좀 숨통이 트였어요. 출구가 보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순간이 찾아오는 걸 보니 살만한 세상이라고...까지 느꼈습니다 ㅎㅎ
지윤이 지수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 자매가 될거에요. 그들만의 텔레파시가 있다고 하잖아요 ^^ 그리고 지윤이...를 더 예뻐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속으로 지수가 참 이쁘네... 한 적 있거든요. 지윤이가 아나봐요. 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