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좋아. 아까 두 가지 조건이라고 했는데, 그럼 남은 하나는 뭐지?”

겨우 침착을 되찾은 메이브가 물었다.

“그건, 나영 선배를 죽인 범인을 찾는데 협조해줘요. 선배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여기 두 사람이죠? 뭔가 실마리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나영 선배가 쓰러졌던 곳에 가볼 생각이에요. 그 외에도 범인을 찾기 위해 최대한 협력해줬으면 합니다.”
“좋아. 화살이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생긴 상황이고, 우리 입장에서도 진범을 찾아서 잡아내는 것이 유리한 일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대신 약속대로 네가 알아낸 것 중에서 우리와 관련된 것은 빼고 금윤의 누명을 풀 정도로만 골라서 발표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상대로 이 정도의 거래를 하다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왕이면 거래보다 협상이라고 표현해줬음 하네요. 그게 더 근사해 보이잖아요?”
“훗. 거래라는 말은 네가 먼저 했다는 걸 잊지 마.”
“앗, 그랬나? ……그랬구나!”

여양은 뒤늦게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참, 하나만 더하자면 앞으로 금윤 선배를 괴롭히거나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두 개라더니 몇 개까지 요구할 셈이야?”

카밀리아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요. LXG 여러분들이 그동안 벌인 일이 많으니까.”
“안 그래도 누구씨 덕분에 앞으론 자중하게 생겼어.”

카밀리아의 투덜거림에 돌로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웃음이 나오냐, 롤리타?”
“뭐 어때, 너도 인정해야지. 우리 다섯은 저 신입생에게 완전히 녹다운 당했다는 걸 말이야!”
“아니, 이건 TKO야. 우리 리더가 반박도 하지 못하고 녀석의 거래를 전부 받아들였으니.”

메이브는 빈 종이컵을 버리라고 아르진에게 반쯤 던지듯 건네고는 두 사람의 말을 자르듯 말했다.

“우린 링에도 오르기 전에 백기를 들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아이가 갖고 온 무기는 보통 무기가 아니었어.”

시선을 다시 여양에게로 향했다. 초록색 눈동자의 광채는, 여전히 미지의 공포를 주었다. 그 안에 담긴 힘을 알게 된 이상, 더더욱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임에는 분명했다.

“너도 우리와의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게. 오늘 밤의 이 대화는 비밀이고, 사건의 진상도 우리와 관련된 부분은 모두 빼줘.”
“근데 그렇게 되면 제가 알아내었다고 발표할 내용이 거의 없어지겠군요.”

왠지 말하고 나니 기운이 빠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생해서 찾아낸 진상이라고는 하지만 공개할 만한 것은 없고, 핵심 중의 핵심인 진범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아직 사건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명탐정 소리는 못 듣게 되겠지. 아쉬워? 네가 한 일을 자랑할 수 없게 되어 섭섭하니?”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과시하기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택도 없죠, 명탐정이라니. 범인도 못 밝혀내는 명탐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 갈게요. 참, 외부로 공개는 하지 않겠지만 금윤 선배와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는 친구에게는 말할 거예요. 저만큼이나 믿어도 되는 아이들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그 아이인가 보구나.”

그들의 마음에 동시에 떠오른 한 소녀, 여양이 지금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 사람. 여전히 궁금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긴 해도, 지금은 이 뿌듯한 승리감에 도취된 채로 있고 싶다. 그와 함께 이 기분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럼 가볼게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그들이 늘 이렇게 밤에 모여서 논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분히 겉치레에 불과하긴 해도, 어쨌든 밤늦게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고, 팔다리가 한겨울이 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쪼그라든 폐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조금이라도 저들의 방에서 멀어지고픈 마음에 여양은 어두운 복도를 달렸다. 연한 초록빛의 비상등만 드문드문 불을 밝힌 기숙사의 복도는 차갑고 쓸쓸했다. 여양은 자력으로 끌려가듯이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문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빨리 응답이 왔다.

“왕님이니?”
“응.”

문이 열리며 파자마에 체육복 상의를 걸친 마트료나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 억지로 잠을 참아 피곤이 쌓인 얼굴은 이전보다 더 창백했다. 달빛과 비상등의 흐릿한 조명 속의 그 얼굴은 공포 영화의 유령처럼 새하얗다.
둘은 잠시 말없이 복도에 나와 등을 기대고 섰다.

“잘 되었니?”

말 안 하고 오래 버티기 시합이라도 하듯 길게 침묵하던 사이, 마트료나가 항복을 선언했다.

“응.”
“너의 추리가 맞았던 거야? 금윤 선배가 한 일이 아닌 게 맞지?”
“응.”
“메이브 선배는 네 조건을 받아들였니?”
“응.”
“잘 되었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별로 밝지가 않네?”

여전히 여양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마트료나의 표정도 조심스레 미소를 감추었다. 돌연 여양의 손이 마트료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마미,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왜, 왜? 무슨 일 있었어?”

“잘 들어. 난…… 너를…… 이 학교의 여왕으로 만들 거야. 그러니까 넌 여왕이 되어줘. 나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여왕님이 되어줘.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넌 나만 믿고 따라와 줘.”
“그게 무슨……?”

둑이 터진 듯 열린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말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비누거품처럼 자유로이 흘러나와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너 초월랑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방법은 하나야. 네가 그의 뒤를 잇는 거야. 행방불명이 된 전임 여왕의 뒤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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