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젠 메이브 선배가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밤중에 나영 선배를 부른 이유가 뭐죠? 선배의 죽음을 자살로 은폐하려던 이유는요? 혹시 이사회의 대응에 대해서도 짐작가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메이브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컵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곤 빈 종이컵을 돌로리스에게 내밀었다. 돌로리스가 병을 들고 술을 따랐다. 그걸 바라보며 메이브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한 건 원나영이 아니라 길금윤이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여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초록빛 눈동자가 알콜 덕분인지 조금 흐릿하게 보였다.
“길금윤을 몰래 만나기 위해 원나영을 잠시 밖으로 내보낸 것일 뿐이지. 하지만 그가 죽어 있는 걸 알고는 우리도 정말 놀랐어. 하지만 우린 이걸 이용하기로 했지.
그렇지만 금윤의 손에 끈을 쥐어놓는다든가 하는 식은 너무 유치했어. 주위 사람들도 믿어주지 않을 테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의심스러운 자살을 꾸민다는 작전이지. 마치 누군가가 죽여 놓고 어설프게 자살로 위장한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야. 짧고 두꺼운 커튼으로 목을 매어 놓은 것도 그런 이유야.
하지만 창문 밖으로 삐져나왔는지는 몰랐어. 그런 걸 발견하다니 제법 날카로운데?”
여양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건 체링이 발견하여 지적한 것이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얼마든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도록 놔두었다. 그게 실토하게끔 유도하는데 효과적일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금윤을 괴롭힌 이유는 따로 있어.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지. 우리의 진짜 목적은 초월랑이니까.”
초월랑?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마트료나가 만났다는 인물, 전임 여왕. 졸업식 날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람.
그런데 돌연 마트료나의 앞에 배를 타고 나타났다 감쪽같이 사라졌고, 금윤이 월랑을 만나고 싶다며 마미의 목을 향해 나이프를 들이대었던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 제공자. 그렇지만 그 모든 것보다 마트료나가 잠깐 만났을 뿐인데도 잊지 못하고 몇 번이나 들먹여 여양의 마음을 헝클어놓았다는 점에서, 마음 한 구석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는 인물. 왜 여기서 그의 이름이 나온 걸까.
처음으로 여양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떠오르자 메이브의 표정엔 대조적으로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도 알고 있는 이름이겠지? 마트료나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테니까.”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찌르다니, 혹시 정말 저 에메랄드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얘기한 것, 조금 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 다만 여기서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히 신문부나 방송부 같이 귀찮은 애들에게는 말야.”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브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 목적은 초월랑을 제거하는 거야. 길금윤은 그러기 위해서 심어놓았던 미끼이고. 초월랑이 왜 사라졌다고 생각해? 그는 분명 여왕 자리를 내놓기 싫은 거야. 졸업식에 불참하고 이 섬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게 그 증거이지. 교칙에 의하면 여왕은 전임이 졸업을 하여 공석이 된 이후 선발하도록 되어 있어.
그런데 전임 여왕이 졸업을 거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여왕을 뽑을 근거가 없어지는 셈 아니겠어?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아무 접점이 없는, 월랑에게 목을 매다는 아이 중에서 하나를 골랐어. 그게 바로 길금윤이야. 내가 가진 에메랄드 아이의 힘으로 걔에게 하나의 암시를 주었지. ‘초월랑을 만나면 숨겨 두었던 칼로 찔러라’라고 말이야.”
주위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 했다. 역시 에메랄드 아이에겐 숨겨진 힘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도 놀랍지만, 같은 학교 학생을 찌르도록 조종했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그 비정함에 숨이 막혔다.
“나중에 금윤에게 슬쩍 물어봐. 그때 나이프는 어디에서 났냐고.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도록 무의식 단계에 묻어 놓은 지령이니까. 금윤은 항상 나이프를 옷 안에 감춰놓고 다니면서도 나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긴 해도,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전 네 친구를 공격한 건 일종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월랑을 만나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일으킨 실수지. 유감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이사회에 대해서 억측은 하지 말아줘. 우리도 이사회의 생각이나 목적은 전혀 몰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싶은 게 이사회의 꿍꿍이거든.
이 학교를 지배하기 위해선 언젠가 이사회와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올 텐데, LXG는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조직인 셈이지. 지금은 비록 유학생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권좌에 오르더라도 우리 멤버만으로 학생회를 꾸밀 생각은 없어. 우수한 인재라면 누구든 받아들일 생각이거든. 바로 너 같은 아이 말이야.”
이젠 갑자기 회유책으로 나오는 걸까. 여양은 이사회 이상으로 메이브의 꿍꿍이속이 궁금했다. 전임 여왕을 비밀리에 제거하려는 무서운 계획을 털어놓은 이유가 자신을 믿기 때문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한통속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아닐까. 사람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한 에메랄드 아이라면 불가능한 생각도 아니다. 그렇기에 메이브는 저토록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치 연기를 하듯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브 선배는, 여왕이 될 수 없어요. 아니 되어서는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