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라고 물어봐도 될까?”

아주 조금, 호기심이 섞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지를 담은 굳은 표정을 보자 이쪽은 되레 기운이 빠지며 헛웃음이 피식 나온다.

“뭐, 네가 날 싫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어.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가 그렇게 안 되도록 막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선배에겐, 여왕의 자격이 없거든요.”

마치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판사의 목소리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말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몰래 조종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까지 이용하는 사람이 이 학교 학생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 여왕은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학생을 대표하여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교사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그런 중대한 자리를 선배에게 내줄 순 없어요.
제가 그동안 모은 증거와 증언은 LXG가 나영 선배의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놓습니다. 실제로 수수께끼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증거는 없지요. 나영 선배는 새벽 1시부터 계속 기다렸고, 2시에 카밀리아와 돌로리스 선배가 나영 선배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잖아요?”

“왓(what)!”
“뭐라고?!”

두 사람의 불만과 경악이 섞인 외침이 방해를 했으나 여양의 단호한 목소리는 끊기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정황을 보면 금윤 선배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은 거죠. 알리바이도 없고, 끈은 땅을 파고 숨겼거나 바다에 던져서 없앴을 수도 있고. 어떤가요? 저도 여러분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증거를 조작해서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아니면 최소한 여러분이 한 자살 조작만 밝혀도 LXG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겠지요.”
“원하는 게 뭐야?”

모래를 씹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밀리아가 물었다. 여양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대답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우선 메이브 선배가 여왕 선발에 나가지 않는 것. 이왕이면 직접 신문을 통해 이번 여왕 선발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게 좋겠죠. 어차피 제가 진실을 밝힌다면, 메이브 선배의 지지도는 추락하고 말겠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시신을 훼손하고 누명을 씌우려 했으니 여러분 모두 이사회로부터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겁니다. 감방에 얼마나 갇혀야 할지, 짐작도 못하겠네요. 그러니 제 제안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불명예와 고통을 받지 않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으니까요.”

LXG의 네 멤버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메이브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돌아가는 룰렛을 보듯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결국 멈춘 화살표는 꽝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한자성어가 진퇴양란이란 것인가 봐.”

여양은 그보다 사면초가 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역시 너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싶었던 거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그토록 열심히 이 사건을 조사하고 그 결과로 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여왕이 되기 위해서겠지. 너의 그 이름에 걸맞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건가?”
“아니오, 잘못 짚으셨네요. 제가 여왕이 되고 싶다면 이런 추한 길을 택하진 않겠죠. 진상을 밝히는 대신 이걸 가지고 선배와 거래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것도 목적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거라고 본다면, 저도 선배나 다를 바 없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잖아요. 방금 제가 제 입으로 선배에게 여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해놓고 저 자신도 이런 자격 없는 짓을 하고 있음을 자각한 이상, 제가 여왕이 된다는 걸 스스로가 용납할 수가 없어요.”

메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고지식한 건지 꽉 막힌 건지, 어쨌든 적당히 회유할 수 없는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멋진 연설이야. 너도 결국 빈나련인가……. 이걸로 왕당파들은 힘을 얻겠군. 이런 강력한 우군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아뇨, 또 틀리셨네요. 모든 학생들이 선배가 아니면 빈나련 선배를 지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빈나련 선배가 딱히 나쁘다거나 자격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뭐? 여왕 후보가 또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메이브도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님이 직접 여왕 후보로 나서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빈나련이 아닌 다른 인물을 지원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자신의 정보망에는 그럴 만한 인물이 따로 없을 터였다. 똑같이 1학년이면서 여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북도 정과는 앙숙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다. 도저히 떠오르는 인물도 짚이는 바도 없다.

“흠. 난 알 것도 같아.”

돌로리스가 돌연 침묵을 깼다. 혼자만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을 띄우자 여양은 그의 수수께끼와 같았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듯한 말들을 떠올렸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던 말. 그래서 돌로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선배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착하고, 그리고 여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굳이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소녀들은 차차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메랄드 아이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그날 밤 느꼈던 존재감과 박력은 역시 허상이 아니었다.
얼른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자라버렸어. 메이브는 허탈한 웃음밖에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감, 자신이 느낀 진짜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 함께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자 메이브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신과 LXG 모두를 합쳐도 그 둘에게는 이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감이 얼마나 정확한지 재확인하는 것은 좋았으나, 나쁜 예감마저 적중하는 것은 기분 좋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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