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틀어져있던 <사랑과 전쟁>을 보고서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에 분노하며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엄마에게도
이 프로그램을 보지 마시라 말씀드렸던 그날의 분노가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느낌이었으니 보다가 몇 번을 멈춰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불륜이라는 통속적이면서도 지긋지긋한 사랑이란 이름의 굴레는 어찌된 영문인지 인간사에서는 멸종될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듯 하다. 고전이든 현대극이든 어디서든 그 모습을 드러내는 불륜은 이
소설에서도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한때는 잘나가는 커리우먼이었지만 지금은 시부모님과의
사이도 좋게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어머니가 원하는 며느리이자 남편이 바라는 아내로 살고 있는 모모코는 결혼
8년차 주부다. 남편과의 사이가 냉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지금의 일상은 그녀가
바라오던 나날이었다. 문화센터에서 비누 만드는 법에 대한 강의를 하며 소소하게나마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평온하게만 느껴졌다.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즈키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한 적이 없는 걸까? 섹스를 했는가, 안 했는가는 관계 없다. 서로 간절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하즈키가 말하는 '일선'은 이미 넘은
것이다. 하즈키의 사고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불륜은 섹스를
했는가 안했는가다. 서로 아무리 간절히 생각해도 섹스를 안 했으면 불륜이 아니란다. -본문
이른바 여자의 육감은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에 밀려드는
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전화벨이 울리고 남편의 목소리의 변화에 의해서 그녀는 무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그녀의 생각들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조금씩,
무섭게 변해가고 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모코는 여전히 '남의 식구'였다. 자신이
살을 부비고 산 부인에 대한 예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의 충성을 다하고 있는 남편 마모루. 그는 모모코에게 자신보다 16살 어린 애인인 나오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오며 이혼을 넌지시 말하고 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모코가 이혼해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그저 애인의 집으로 피신해 버린다.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마무로의 어머니인 데루코는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모모코에게 '너'가 이 집에 들어올 때 '우리'는 모두 속았다,
라며 모모코와 당신 가족들을 철저히 구분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일기 속의 나는 줄곧
행복한 여자인 척해왔을지도 모른다. 방심하면 정말 이상한 여자가 돼버린다. 내가 이대로 이혼을 거부하면 어떠헥 되는 걸까? 마모루는 제삼자가
개입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요컨대 조정 이혼이 될 것이다.
그런 경우, 나를 이 별채에서 가정법원으로 끌어낼 생각인 걸까. 시어머니에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라도 하고 가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 그 바보한테는 계획성이 없다.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살아온 지난 팔 년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본문
어느 순간엔가 이 모든 것을 향했던 분노가 의구심으로
돌변하게 된다. 과연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이 분노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니. 그러니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히 구분되어 이 사건의 가정 파탄범임 불륜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맹비난을 하던
나와 그 사건 속에서 종종거리며 모든 것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인의 몸부림을 보면서 그녀가 미쳐가는 순간마저도 괜찮아, 이해할 수 있어, 라고 읊조리던 내게 그녀들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다.
버드나무처럼 언제나 흔들리는 남자라는 것을 그때의 모모코는
몰랐을 것이다. 당시의 그녀도 모든 것이 사랑으로만 가득한 세상 속에 있었고 자신들이 들어선 그 곳의
영롱한 빛에 취해 그 뒤에 생긴 그림자 속의 장막에서 울고 있는 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과연 사랑이라는 녀석의 얼굴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도통 가늠할 수 없다,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에 모모코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는
순간, 이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겠구나, 라는 가늠만
할뿐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안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얼굴이 담겨 있는 것인지. 과연 이들의 사랑도 사랑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 나는 답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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