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소녀와 마흔의 중년 남성과의 사랑. 이 한 줄만 보더라도 이들의 이야기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래,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추접한 인간의 욕망을 담은 것이었고 사랑이 아닌 유린이며 원조교제와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요하네스의 집은 마리아가 안식을 취할 수 있을 만큼 안락했던가? 브렌델 농장을 가꾸고 있는 그의 집안의 가장인 지크프리트와 어머니인 마리안네는 농장과 가게를 하느라 바쁘기만 하고 요하네스의 할머니인 프리다와 알프레드가 집안일과 농장일을 돕고 있다. 프리다의 첫째 아들인 폴커는 알고 보면 알프레드의 아들일 것이라는 소문은 물론 둘째 아들은 사상범이 되어 현재 이 동독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가정 또한 불안정하여 그녀가 스스로 벗어나려 했다면 그리고 나서 그녀가 함께하리라 마음 먹었던 요하네스의 집 역시도 평온보다는 분주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삶으로 이미 버거운 상태였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그곳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요하네스와의 사랑이었으며 그와 하나되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는 자신이 있는 이 곳이 평온하다 느꼈을 것이다.
갑작스런 사고가 발생한 그 날,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게 된다. 사고가 있던 날, 그녀의 엄마는 집으로 향하게 되고 마리아를 치료해주겠다는 헤너의 약속에 마리아를 떠넘긴 그날, 그녀는 헤너에게 겁탈을 당하게 된다. 제 3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틀림 없이 헤너가 마리아를 범한, 끔직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마리아 내면에서는 그에게 당했다, 라는 것이 아닌 점차 그에게 빠져들어 가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를 사랑이라 믿어버리게 된다.
그는 이제 사진만 볼 뿐 나는 아예 보지 않는다. 며칠 전만 해도 그의 관심을 되찾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을 거다. 말을 걸어보고 아양도 떨어보고 화도 내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식어갈 때 흔히 하는 일을 모두. 하지만 나는 이제 담담하게 행동하면서 언뜻 보기엔 너그러이 새로운 열정의 마법을 그에게 넘겨준다. 정말 완전히 무덤덤하다. 내 관심은 오직 이웃 농장 남자한테만 쏠려있다. –본문
그렇게 헤너와 마리아의 사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마리아의 내면은 끊임없이 변모하며 그 안의 자신의 모습들로 인해 극과 극을 달리게 된다. 그 누가 뭐라 그래도 브렌델 농장에서의 마리아는 16살의 소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헤너 농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소녀가 아닌 여자로서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을 요구할 수 있는 당당함을 느끼게 된다. 마리아를 원하는 남자들의 태도에서도 언제나 죄가 아님을 인지시켰던 헤너의 모습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이 안에서만큼은 떳떳하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열 여섯까지의 세상 안에서 그녀가 마주한 가장 밝은 세상이라 느꼈을 테니 말이다.
이 둘의 사랑에 대해서 어떠하다, 라는 판단 대신에 과연 마리아가 헤너의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그녀는 이 시간들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서평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열 여섯 마리아에게는 온전한 사랑이었을 그 시간을, 미래의 마리아는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지금의 내가 느끼는 착찹함을 그녀 역시 느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