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오래 전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라는 소설을 읽고서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읽었다면 이게 뭐야? 하면서 초반에 바로 덮어버렸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 이해해!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삶도 있을 수 있지,
라며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끝까지 볼 수 있는
그 정도의 인내심? 혹은 배려?는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든 생각은 다양한 삶의 존재에 대해 인정한다는 내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릴 적의 확고했던 관념이 무너져 버린 것은 아닐까? 라는 또 다른 두려움이 공존하는
그 묘한 느낌이 싫어서 당분간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읽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던 것이 벌써 몇
년이 흘러 이 잡동사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이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좀 멀리해야겠다, 라며 말이다.
"추억의 물건들이네요."
엄마가 한마디 거들자 사야카 씨는 손에 든 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잔은 천천히 흔들어 백포주를 회전시킨다. 그리고 말했다.
"잡동사니들뿐이예요."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하지만
어쩐지 자랑스러운듯이. -P294
널부러져 있는 물품들, 꼭
없어도 될 것만도 하지만 그 안에 하나하나의 추억이나 기억들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잡동사니라고 하지 않을까. 잡다한 듯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그 이야기들이
이 소설 안에 담아있다.
내가 소녀의 아버지와 잔 것은 그날 밤이었다.
도서관에서 두 시간쯤 일을 한 뒤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P42
남편을 너무도 사랑하는 마흔다섯 살의 슈코. 언제 어디에 서있던 그녀의 주변에는 남편이 존재하고 있다. 모든
중심에 남편이 있지만 그 남편은 너무도 자유로운 연애사상을 가진 남자이자 그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는 일은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을 진정 이해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어떠한 마음이었을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는 있어도
독차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정사를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독차지하고 싶다면 원치 않는 것들까지 포함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편의 여자 친구들이라든지......P27
남편은 알고 있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빠져들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처럼
그래서 슈코는 그 앞에만 서면 항상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현재 여자친구도
이미 지나간 과거마저도 잡동사니들처럼 치우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하면서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초연하게 오늘을 보내고
있다.
"슬퍼해줄 사람이 없다면, 나는
누구와도 잘 수 있다고 봐."
일찍이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슬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한 남편의 잔혹함을 나는 힐난했다. 하지만
그때 남편은 이런말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실제로
누구하고라도 자야 해."
만약 그렇다면...... 남편의
냉정함에 나는 언제나 놀랐다. P214
사랑하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 이 부부의 이야기를 보면서 변화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변화에 대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하기 위해
상대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상대를 사랑하는
것마저 이해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1:1의 사랑보다도 더 커다란 경지의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 경지에는 오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그렇게 하며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다.
노래하듯이 엄마가 말한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남자다. 사랑이다. 그리고
전화다. -P123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열다섯 살의 미우미. 세상에 대한 관심을 배척하면서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려는 듯한 미미, 이
책에서는 미미라고 더 많이 불리기에 미우미 보다는 미미가 더 편한 듯 하다. 엄마 아빠와의 이혼 이후
또 어디서든 여자를 찾아내는 아빠의 능력과 연애가 없는 동안에는 죽은 듯이 사는 엄마 사이에서 미미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오히려 무관심해 지고 멀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의 생활도 단조로우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는
있지만 정작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는 드러내는 법이 없는 미미. 그 앞에 슈쿄의 남편 하라를 만나게 되며
미미는 그 작은 떨림에 반응하게 된다.
"오늘은 기분이 엄청 종아 보이네."
그렇게 하라 씨에게 지적받았을 때에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대답은 자연스레
나왔다.
"보고 싶단 말에 기뻤어요."-P300
하라와 미미와의 정사로 이 책은 마무리하게 된다.
마흔다섯 살과 열다섯 살의 잡다한 이야기 속에 무엇도 남기지 않고 휘리릭 통과해 버린 듯한 느낌.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은교를 읽었을 때도 이러한 파장은 없었는데. 아, 복잡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