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에 그다지 재능이 없기도 없어서였겠지만, 초등학생 때 준비물로 서예를 준비해야 하는 날이면 항상 뾰로통해 있었다. 벼루며 먹이며, 무겁기도 무거웠지만, 먹을 가는 것도 그렇고 서예를 하는 날이면 꼭 어딘가에 먹이 튀어 올라 옷을 버렸기에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억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특히나 평상시에도 글씨를 잘 못쓰는 대다, 붓으로 글씨를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기에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 먹과 벼루와 화선지는 영영 친해질 수 없는 세계였다. 아마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전통 그림들에 대해서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동양화 보다는 알록달록하니 다채로운 서양화를 더 좋아했었고 단조로우면서도 차분한 느낌의 동양화 속에서 여백의 미를 느끼기는커녕 그저 심심한 그림으로 치부했으니 비루한 안목은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 듯 했다. 그렇게 별 생각이 없이 지내던 찰나, 외삼촌 댁에서 대나무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놀러 갔던 외할머니 댁에 걸려있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림이었다. 아마 늘 그곳에 걸려 있었겠지만, 수묵화에 관심조차 없었기에 눈길도 안준 탓이었을 것이다. 긴 화선지 위로 대각선으로 드리워진 대나무 그림이었는데 물 양의 조절로 먹의 농도를 달리하여 그린 그림이었는데, 다른 색채가 없는 먹으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그 그림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구도도 그렇고, 먹 하나만으로 음영을 나타내는 것도 그렇고. 단 한 번의 붓터치로 수정도 할 수 없는 화선지 위에서 대나무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수묵화에 이런 매력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그 당시에 처음 하게 되었다. ‘터럭 한 올도 다르게 그리지 않는다.’ –본문 이 책을 보는 순간 그 당시 마주했던 대나무 그림이 생각나며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마냥 나와는 별 인연이 없다며 외면 하는 것이 아닌 선조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 터럭 한 올도 함부로 그리지 않는 그 장인정신이 깃들 그림을 보며 그림을 넘어선 그 안의 이야기를 배우고 싶어졌다. 인물화는 산수화보다 먼저 발전했다고 하는데 인물화는 대상을 그대로 그리면 되는 반면 산수화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와 조화를 따져 그 모든 것을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야 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이 책에서도 초반에는 초상화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고 후반부에 가서야 산수화를 소개하고 있다. 인물화를 통해서 기반 내용을 다잡은 이후 조금 더 어렵다는 산수화를 마주하면 더 깊이 수묵화에 빠져들기 바라는 저자의 배려가 담겨 있는 듯 하다. 조상신을 모시는 유교가 널리 퍼지면서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를 많이 사용했다. 돌아가신 조상을 정성껏 모시려는 마음에 살아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상화를 걸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모습을 ‘터럭 하나라도 틀림없이’그리는 것을 강조했고, 외형적인 유사함도 중요하지만 정신과 기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더욱 중시했다. 그 결과 섬세한 붓질로 자세하게 그린 얼굴은 겸손과 소박을 미덕으로 삼은 선비들의 성품을 잘 드러냈고, 간단하게 그린 신체는 절제된 몸가짐을 잘 보여준다. –본문 하기야 사진기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그림 이외에 조상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교를 기반으로 했던 조선시대에 초상화는 당시 사회상이나 종교적인 기반을 안고서 성장하게 된다. 
이 그림을 몇 번 본 기억은 있지만, 누구의 초상화인지, 누가 그린 것인지에 대한 것은 전혀 몰랐다. 그저 그림만으로도 그 눈빛이며 외형에 압도 된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이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당시 심각한 당쟁으로 인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과 그림에 심취하여 지냈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그가 남긴 자화상은 조선의 미술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자화상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대부분 전문 직업 화가로서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자부심이 높지 않았다. 또한 자화상을 그린다고 한들 남들에게 보여 주거나 어디에 걸어 놓고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한편 취미로그림을 그리는 문인 화가들의 경우는 대개 정교한 자화상을 제대로 그려 낼 만한 그림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윤두서의 자화상은 매우 드문 사례다. –본문  이 수많은 페이지 속에서도 여자의 초상화는 3점 정도 밖에 보이질 않는다. 조선 초기에는 그래도 꽤나 많은 작품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성리학이 점차 깊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한 집안의 여인들을 화가가 바라보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면서 남아 있는 작품의 수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몇 점의 작품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모습이기에 더욱 귀중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기에, 여인들의 초상화에 유독 관심이 갔는데, 그 중에서도 한때 기생의 신분으로 살았던 최연홍의 초상이 더욱 눈길이 간다. 조선 말에 가슴을 살짝 드러내는 의복이 입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정말일까? 라는 의문이 들곤 했었는데 이 작품을 보고 나서는 그 물음이 풀리는 듯 했다. 가슴을 드러냈음에도 외설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당시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거니와 한 어머니의 모습이었기에 고운 자태가 눈에 든다. 얼굴은 이목구비를 작고 단정하게 그렸는데 양 볼에는 붉은 홍조를 표현했다. 채용신이 다른 초상화에서 강조하던 명암법이 이 그림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온화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에서 기녀의 요염함 보다는 열녀의 절개가 드러난다. -본문
학을 아끼는 선비들은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림들을 보며 선비들의 절개에 대해서도 배워본다. 그 당시 학을 종종 키웠다는 선비들을 보면서 얼마나 야생동물인 학을 키우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학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엿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그림 속 주인공인 임포가 학을 바라보는 모습인 듯 하지만, 저 학은 임포에게 손님이 왔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날아든 것이라고 한다. 애완견처럼, 학이 주인에게 날아든 것이다. 이렇게 매화를 사랑하고 학을 아끼던 임포를 은일자로 존경하여 '매처학자'(매화를 부인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음)라고 불렀다. -본문 요즘 들어 쉬이 볼 수 없는 수묵화들을 이 한 권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갑다. 그림 한 점에 각각 설명이 담겨 있기에 그림만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세세히 바라볼 수 있기는 하나, 작품 설명이 조금 더 길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대부분 그림 한 점에 한 바닥 정도의 설명인데 더 세세한 내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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