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했던 박완서 선생의 '노란집'을 덮고서 바로 읽기 시작한 '이 치열한 무력을'을 보면서, 표지 의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만으로도 압도 당해 이 책 만만치 않겠구나, 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서야 겨우 책을 읽기 시작한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문 분야의 책은 생소하다 못해 생경한 분야이며 그럼에도 어떻게든 읽어보려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 속도나 이해의 정도는 다른 책들에 비해서 현저히 떨어지고 스스로도 나에게는 아직 버거운 분야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질겁하게 만들어 진정 나약한 자세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의 기선제압에서 이미 압도된 나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무력함을 느끼며 이 책을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 '말이 태어난 곳'을 읽으면서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라는 생각과 이해가 됐다 싶으면서도 다음페이지에 들어서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 때문에 30여 페이지를 읽는데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할애되었다. 400여 페이지를 다 읽으려면 최소 13시간은 필요하겠다는 계산만으로도 식겁하게 했던 이 책을 읽고 난 그 소감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말이 태어난 곳'을 너무 겁을 먹은 상태에서 읽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너무 거대하게만 보았다는 것.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처음에 배치되어 있는 말이 태어난 곳처럼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기에 굳이 처음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2. 저자의 책을 읽어보고서 이 책을 접하였다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야전과 영원', '잘자라, 기도하는 그 손을', '구하 전야',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등등 각각의 대담에는 저자의 책이 등장하곤 하는데, 물론 이 모든 책을 읽어보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문제는 없다고는 하지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기만 할 뿐 주도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잘자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 책은 이 치열한 무력을에 너무도 자주 등장하기에 대체 무슨 내용일까? 라는 궁금증을 넘어서서 점령하고 나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리라! 라는 욕망마저 들끓게 한다. 3. 책을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는 것이 하나의 장점이면 장점이다. '말이 태어난 곳'을 읽고서는 기진맥진하여 맨 뒤의 옮긴이의 말과 추천의 말을 뒤적거리면서 찾아낸 사실이었는데, 각 대담은 그 주제별로 나누어 담아져 있기에 굳이 처음부터 정방향으로 독서를 하기 보다는 읽어보고 싶은 순서대로 골라 읽을 수 있다는 배려는 이 책에 대한 접근성을 도모하는 꽤나 유용한 점이었다. '말이 태어난 곳'은 아직도 정리가 덜 된 탓에 이 리뷰에서는 논외로 하고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벼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이란 부분과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이 2 파트의 내용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에 대한 저자의 시각을 담은 전자의 내용과 AV와 문학에 대한 공통분모에 대해 논하는 후자의 대담은 꽤나 이색적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에 푹 빠져서 읽어 내려간 부분이었다. 치욕은 굴욕과 다릅니다. 치욕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자신에 기인한 그 무엇이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그것은 항상 '그 누구'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중략) 이 대지진, 이 재해, 이 사태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우리의 손도 더러워졌다는 겁니다. -본문 헤겔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어떠한 사건을 바라보았을 때 그 사건에 대해 비판하고 반비판는 과정 자체를 '역사'로 바라보며 그 역사야 말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바, 축구 토너먼트 경기의 경우, 모든 경기를 치르고 우승팀을 가르는 그 모든 일정을 헤겔이 말하는 역사라고 하는 것인데, 필자의 경우 이러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해서는 플루토늄 239의 반감기가 2만 4천년 이기에 헤겔의 철학으로는 이 문제를 논할 수 없다 주장하고 있다. 그 누가 이 사태에 대해 끝을 말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원전 후 사태는 지금도 계속해서 그 후유증이 지속되고 있으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끝이다, 라며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치욕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그 문제를 즉시하며 '지나갔다'라며 흘러 보내지 않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한다'고 변명하면서 하는 것이 가장 꼴불견이잖아요? 일본 근대 문학과 AV가 노골적인 묘사를 통해 '진리'와 '현실'에 이른다.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베일이나 모자잍크가 그 운동을 지탱하고 있다. '문학은 진리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봐라. 이런 말씀이시죠? 베일을 벗겼다고 생각하겠지만 또 베일이 나타납니다. 베일을 벗겨내지 못하면, 벗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베일을 벗겨내고 싶다는 욕망이 출현합니다. -본문 일본 근대문학과 AV의 공통점에 대해 논하는 부분에서는 그 누구도 문학을 AV에 비추어 생각이나 해 봤을까,라는 것과 이러한 주제를 대담으로 선정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그 자유로운 그들의 대화 속에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AV라는 선정성에 초점을 맞춰서 그들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노골적인 묘사와 서사를 기반으로 두 가지 모두가 존재의 근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에 대해 논하는 그들의 대담이 깊어갈수록 다시금 원전의 현실까지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 속에 빠지게 된다. 어려운 듯 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 새 페이지가 꽤나 움직여 있었다. 초반의 멘탈 붕괴만 넘긴다면 그 뒤의 그들의 대담하면서도 깊은 대담에 함께하며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