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前사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르's Review

 

 

 

한국사를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서 격양된 목소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하며 탄식을 금치 못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멍하니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그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해방과 동시에 분단국가로 나뉘게 되었던 그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김구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간발의 차이로 역전되어 버린 새로운 시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분명 나 역시도 고등학교를 재학했던 때에 국사라는 과목을 배우긴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국사()에 속했던 근대에 대한 내용은 머릿속에 잔재해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정말 그야말로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다는 수준만을 알고 있는 정도인데 매번 공부를 좀 해 봐야지, 알아봐야지, 란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그게 또 생각처럼 쉬이 행동으로 따라주질 않는다.

TV를 켜기만 하면 독도를 제 땅이라 목놓아 놓고 있는 일본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은 울분만을 안고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을 과거를 바꾸는, 그 파렴치한 일을 감행해서라도 그들의 역사를 정당화 하려는 마당에, 이 나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저 그들의 만행을 목도하고 있을 수 많은 없지 않을까. 이 무지를 당당히 고백하고 다시금 배워 그들 앞에서 우리를 당당히 외치기 위해서는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리하여 이전에도 몇 번 마주했던 이덕일 저자의 이 책을 골라 집었다.

공자가 <춘추>를 짓자 천하의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고 전하고, 고려인 이규보가 <동명왕편>서문에서 국사는 세상을 바로 잡는 책이라고 말한 것처럼 역사학은 강한 가치지향성을 지닌 학문이다. 그러나 역사학의 비판은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 사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모색이어야지 특정 정치집단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로잡는 도구라고 우기는 것일 수는 없다. –본문

팩트 자체를 조작하거나 이러한 팩트의 일부분만을 설명하는 통에 국사 인식체계가 신민사학이 되어버렸다는 저자의 주장에 따라, 그는 거대한 굴레 속에서 가려져 왔던 전반적인 틀을 제대로 재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거대한 이야기들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 이상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었고 이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역사적 배경들은 처음 접하는 것들도 꽤나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단체들의 등장이 거듭될수록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는지에 대해 대변해 주는 터라, 묵묵히,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말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마트베이 김은 김알렉산드라의 전기에서 백위군 장교가 조선인인 그대가 왜 러시아의 시민전쟁에 참가했는가?” 라고 묻자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답하고 총살당했다고 전한다. –본문

 일제 식민지 시대에 광복을 위해 수 많은 이들이 자유를 외치는 우리의 선조들은 자국에서 자국의 자유를 외쳤다라는 이유로 일본인들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수 많은 목숨을 내 놓아야만 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는 사회주의의 움직임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어떻게든 우리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태동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진화론이 일제의 식민지를 합리화하기에 사회주의 사상으로의 접근이 도모되었으며 이들은 계속 다른 이름으로 사회운동의 주력을 잡으려 했으나 결국은 그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그리고 한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주의가 아닌 코민테른의 시각으로의 접근으로 우리나라의 사회 운동은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낙화하게 된다.

이들의 인생 궤적을 이해하려면 어린이들을 전쟁기계로 만들었던 일본의 육균유년학교를 주목해야 한다. 13~14세 어린아이들에게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시키던 비정상적인 교육시스템이 육군유년학교였다. (중략)

급기야 그는 1901년 동급생과 칼부림 사건을 일으켜 퇴학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감수성을 모두 억제하고 전쟁기계로 변모해야 살아남을 수 있던 육군유년학교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다. –본문

일본의 악행은 그들이 아무리 그 만행을 덮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군인들의 대다수는 장병이기 보다는 소년병들이 대다수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세뇌를 받았겠구나, 라고 가늠하고 있었는데 이 책자에서 만나게 된 그들의 행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자국의 아이들에게도 이럴지 인데 그들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게 하는 행태는 이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아니 세상에 흔적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수였으며 그리하여 만천하에 알려진 장작림 폭살사건은 그럼에도 유야무야 하며 묻혀 버리게 된다. 그들에겐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패가 되어버린 조선인은, 더욱이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는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서도 반드시 없애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공립신보> <민영휘의 말로>란 제목으로 평안감사 재직 때 토색질한 수만금에 대해 억울하게 빼앗긴 백성들이 민씨 집에 답지해서 빼앗긴 물건을 환수하려 하므로 장차 가산이 탕패될 듯하다더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재빨리 일제로 말을 갈아탄 민영휘를 백성들이 이길 수는 없었다. 이소사의 소송도 2심에서 민영휘가 승리했다. 일제 <통감부문서>에 따르면 일본 왕가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신봉하는 신궁봉경회의 고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본문

일제의 만행 속에 어처구니 없이 함께 뛰노는 망둥어가 있었으니 바로 일제의 우산 속에 들어간 친일파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제 나라를 팔아 넘겼다는 죄책감 따위는 없이, 사는 것만으로도 고역일 수밖에 없는 순간 순간 속에 있는 이웃들의 앞장서서 핍박하며 그들은 더욱더 호위호식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고리대금은 물론이거니와 농지 강탈을 하면서 조선의 농민들을 농락했던 일제와 함께 손을 잡으며 현재에도 여유로운 이들만이 그라운드를 누빈다는 골프를, 그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들은 웃으면서 공을 치고 있었다.

 식민지 한국의 상류 사회 모습이라고 보여주고 있는, 총독부와 함께 나란히 웃으며 골프를 치던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데 이 곳에서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는 이 웃음 소리가 오늘날까지도 뿌리 뽑히지 않고, 음흉하게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國語를 하는 이들에게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이라며 고문을 가하던 그 친일파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들은 지금 어느 나라의 말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어 진다. 그토록 그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그들의 말을 쓰고 계신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담뱃불을 떠안고 가서 확인하고 싶어진다.

 어떻게든 이 나라를 손에 넣고 싶어하던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그 규모를 키워가지만 단 한 평의 영토로 얻지 못하고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8 15일 중국 서안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라고 토로했다. –본문

 그들의 패망과 항복소식은 우리에게 더 없이 기쁠 이야기겠지만, 이들이 흰 깃발을 내 흔드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조금이라는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우리 손으로 조국의 광복을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악연의 고리는 마지막까지도 우리를 그들의 늪까지 함께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광복이 된 순간부터 또 다시 권력의 눈치게임이 시작된 당시의 모습은 기쁨이라기 보다는 혼란 속에서 숨가쁘게 지나가고 있다. 드디어 목도하게 되는 남북의 점령한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야기는,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의 의미를 이제서야 깨닫게 되면서 그 순간 우리의 역사는 멈춰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 읽어낸 책을 덮는 순간 정신이 또렷해 지는 느낌이다. 왜 역사를 알아야만 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은 물론이거니와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실체를 마주하고 나니 왜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숨기려고 했던 것인지도 알게 된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 역사에 대한 바른 앎, 이 하나를 위해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바이다.

 

 

아르's 추천목록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저

   

 

독서 기간 : 2013.11.14~11.17

 

by 아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미스터리
J.M. 에르 지음, 최정수 옮김 / 단숨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아르's Review

 

 

 

 

 

 세계 최초의 민간자문탐정이자, 그 앞에서면 어떠한 난제라도 단숨에 해결된다는 세상의 최고의 탐정 '셜록 홈즈'. 그의 이름에 대해서는 누구든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보기는 하였으나 추리 소설에 대해서는 별다른 흥미가 없던 터라 원작들을 읽어본 적은 없고 몇 해 전 나왔던 영화로만 그를 접한 것이 전부였다.

갑작스레 도착한 이 책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빠져 있던 것도 사실이다. 셜록 홈즈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추리 소설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었기에 읽는 것 조차 고역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고민이 있었는데 띠지에서도 당당히 유혹하고 있는 "당신이 셜록 홈즈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이 소설은 매우 재미있다" 라는 말은 이 책을 읽고 나서 초반의 고민이 기우였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충분했다.

 저자인 J.M. 에르는 진심으로 셜록 홈즈에 푹 빠져 있는 존재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기반으로 한 이러한 오마주 격 소설을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설이 가득 내린 어느 호텔에서 발견된 11구의 시체가 이 소설의 장막을 열고 있다. 그 누가 추리 소설이 아니랄까봐 보란 듯이 초반부터 등장하게 되는 이 암담한 상황을 보면서 쉼 호흡을 하면서 어떻게 이것들을 풀어나가게 될지에 관해서 고민하고 있는 찰나, 그보다도 이들이 이 호텔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안에 왜 모이게 되었느냐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 명문대인 소르본 대학교에 개설된다는 홈스 학과의 정교수로 임명 받기 위해서 보보 교수의 주관 하에 이 자리에 모이게 된 사람들. 신설되는 학과의 초대 정교수 자리를 두고서 벌여질 각축전은 뜻밖의 난관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은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이 모든 사건의 진상은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인 메모와 녹취록 등을 통해서 하나하나 그들이 살아 있을 당시의 모습들을 쫓아가게 되는데, 셜록 홈스의 정교수 자리를 두고 모인 이들은 자신들이 왜 이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인지에 대해 피력하는 부분을 쫓다 보면 초반의 섬뜩했던 사건들은 아스라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것이 아까 말한 다른 자료입니다. 이 자료가 셜록 홈스와 몽펠리에 시 사이에 얽힌 비밀스러운 관계를 여러분에게 알려줄 거예요.”

 그게 뭔데요?” 에바가 물었다

 ……. 이것은 발표되지 않은 육필 원고입니다. (일동 경악) 저는 아버지가 몸져누워 계시던 침대맡에서 감동적인 생각 하나를 아버지께 말씀드렸지요. (일동 가장된 연미을 표함) 이 육필 원고는 제 아버지가 셜록 홈스의 증손자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일동 폭발) -본문

 그저 소설 속 하나의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들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홈스와의 관계에 대한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때론 이런 엉뚱함 때문에 피식 웃음이 돌기도 한다. 다소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이들의 주장은 어찌되었건 홈스 학과의 정교수에 도달하기 위한,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단 한 명의 생존자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 최소한 정교수의 임명권자였던 보보 교수는 살아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에 가서도 다시 한 번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는 맥락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영원히 홈스가 재 탄생 될 수 있음을 시사해 놓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셜록 홈스는 변장의 명수이다. 왓슨은 자기 멘토인 홈스가 신분을 바꿔 자신을 속여 넘긴 것에 여러 번 경탄했다. <찰스 오거스터스 밀버튼>에 나오는 염소수염을 기른 젊은 배관공은 <빈집의 모험>에서 다리를 저는 노인이 된다. <마자랭의 보석>에서는 나이 든 부인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사건>에서는 이탈리아인 성직자의 모습을 한다. –본문

 셜록 홈스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추리 소설답게 소설 곳곳에는 셜록 홈스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전에 이미 홈스의 이야기를 접한 이들이라면 이러한 문장들을 찾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소설에서 홈스에 대해 처음 접한 나로서는 저자의 다분히 의도적인, 홈스의 독자들을 위한 배려를 마음껏 누릴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되었든 독자가 범인으로 미리 선택하는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는 논증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추리소설을 정말 제대로 읽을 줄 아는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을 정말 제대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조종되고 있을 뿐인가? –본문

 저자는 필자의 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데 추리소설을 처음 접해보는 나로서는 정말 제대로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들곤 했다. 대체 누가 범인인가! 에 대해서만 몰두하며 읽다가 마지막의 범인을 보고서는 대체 어디서부터 단서를 놓치고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자책이 들기도 했는데, 어찌되었건 마지막까지 이 소설을 놓지 않고 읽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큰 수확이라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 소설을 덮은 듯 하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모든 것을 걸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던 셜록 홈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로 인해 다시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는 이 소설을, 추리소설의 추리조차 몰랐던 나 역시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는 이 소설은 그야말로 추리 소설로의 입문자들에게 적당한 책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아르's 추천목록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아가사 크리스티

 

 

 

 

독서 기간 : 2013.11.16~11.17

 

 

by 아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 열한 시 - 120 True Stories & Innocent Lies
황경신 지음, 김원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아르's Review

 

11.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 듯 하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늦은 듯한 감이 있는 이 시간 동안 나는 주로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누워서 책을 보곤 한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는 날도 있지만은 몇 줄을 내리 읽지 못한 채 계속 그 자리를 맴도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하루 동안 있었던 생각이나 그 이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 속으로 한 없이 빠져드는 경우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이성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감성적인 시간이 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에 그는 계절이 지나가는 시간마다 아침의 인사와 밤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나에게는 일어났으나 너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너에게는 희미했으나 나에게는 또렷했던 일. 나에게는 무거웠으나 너에게는 가벼웠던 일. 너에게는 잊혔으나 나에게는 문신으로 새겨진.

그 과거의 언젠가는 단 하루가 아니라, 여러 겹으로 짜인 날들의 씨줄과 날줄 속에 스며들어 미래의 언젠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를 테면 그 언젠가는 언제였던가. 배들로 항구로 돌아오고 사랑은 날개를 퍼덕이고 내 앞에 당신이 있었던. -본문

 

감성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버거운 것들이 아닌, 읽을수록 진한 느낌이 베어 나오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밤 늦게 시작된 독서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 책을 안고 있게 한다.

한 때는 가슴 시린 아픔이었을 이야기마저도 그는 참으로 덤덤하지만 그 때의 아픔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미 지나쳐버린 과거이지만 내게는 어제의 생채기처럼 남아있는 일을 그를 문신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눈 앞에 자리하고 있을 그를 다시 마주한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너를 다 그리진 못했지만 너의 일부를, 혹은 너와 나눠 가진 시간의 아주 사소한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약속을 그린 거라고 믿었다. 언젠가 내가 너를 잘 그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붙잡고 서투르게, 서투르게. 그리하여 그 질문, '내가 너를 그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당분간 의문형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어딘가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이렇게 많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고맙다. -본문

 

3차원 속 세계를 스케치북에 처음 그리게 된 날, 그는 그의 지인을 조심스레, 부끄러운 손길로 그리고 있었다. 헛헛했을 그 손길이 닿은 그 결과물을 보고서, '내가 있네'라고 이야기 해주는 그 지인이 있어서 훈훈했던 그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어서, 그들의 하루가 나에게까지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만약 올라가는 모든 것들과 내려가는 모든 것들이 온전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쉽게 지쳐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별 재미도 없겠지, 라는 생각도 든다. 온전한 것들 사이에 반음이 끼어듦으로써 '완전'해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사실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본문

 

피아노 음계에서마저도 하나의 인생을 읽어내는 그의 이야기를 보면서 밤 11시가 훌쩍 넘은 새벽 1시로 넘어가고 있었다. 가을에서 시작된 여름까지의 여정 동안에 하루하루의 숫자가 담고 있던 의미를 넘어선 이야기들이 참 포근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의 하루는 다 지나가고 내일의 하루가 다가오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 걷다 보면 소담스러운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닐 것만 같다. 한 권을 금새 읽어버린 것이 아쉬울 만큼,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진다.

아르's 추천목록

 

생각이 나서 / 황경신저

 

 

독서 기간 : 2013.11.16

 

 

by 아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 - 최돈선 스토리 에세이
최돈선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아르's Review

 

실은 저자의 이름을 보고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의 이름 보다는 책 뒤에 쓰여있는 추천인들의 이름만이 익숙했다. 이외수 작가, 이순원 작가, 류근 시인이 말하는 최돈선이라는 이는 모두다 그들의 생에 있어 따스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 듯 했다. 특히나 "최돈선은 물빛의 시인이다" 라고 소개한 류근 시인의 추천사를 보며 이 책에는 대체 어떠한 이야기가 담겨 있길래 이들이 이토록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이 일었다.

살아 있는 동안 세 권의 시집을 남기고 가고 싶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한 회한과 그럼에도 여전히 생이 이어지는 동안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길을 위해서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미 내가 살아온 삶의 갑절을 지나온 이의 유려함이 느껴졌다.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을 몸소 지나쳐온 이의 여유일까. 그렇다고 모든 시간들이 언제나 웃음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의 이야기 하나하나에는 따스함이 묻어 나고 있다. 그 어떤 이야기도 ''라는 시간을 통과하면 동화로 재탄생 되듯, 읽는 동안 아련함도 느끼고 나지막한 웃음이 나기도 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 우린 언젠가 가야 할 데가 있는 법이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가는 것이다. -본문

 

휘엉청 바람을 타고 날리고 있는 연을 보면서, 그 연이 결국 감나무에 걸려 힘겹게 펄럭이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미 육체를 이 곳에 두고 떠나가셨다는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픔 보다는 그 또한 생의 하나의 관문인 듯 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살아계실 적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노모와의 밥통에 관한 작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 명의 소년을 목도한 기분이었고, 그런 그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태산 같은 선생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소년과 선생이 공존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그 안에 켜켜이 담아온 그가 지나온 시간 덕분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를 쫓아 해본다 한들, 그 세월을 힘을 한 순간에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노년의 영혼은 죽음을 압니다. 죽음이 어디쯤에서 친구하려고 대기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걸 아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외롭지가 않습니다. 죽음이란 친구를 맞이하면 한없는 평화와 자유가 있을 테니까요. 이제 마음을 놓고 생각을 놓고 삶의 욕망을 놓고 자유로이 죽음과 친구되어 놀 날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본문

 

아직 인생의 1/3정도의 시간 밖에 지나오지 않은 나로서는 그의 모든 이야기들을 주억거리며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나도 모르게 푹 빠져서 이야기들을 읽은 것 만은 확실하다. 익숙하지 않은 문체들과 상상해 보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마저도 다시 읽어보면서 피식 웃게 만드는 힘을, 그리하여 그가 써 내려왔던, 아니 지나왔던 인생을 엿보며 언젠가 그가 있는 현재의 시점을 내가 당도하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 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된 그가 20대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하는, 뭔가 동화처럼 어딘가엔 실존할 것만 같은 따스한 이 책을 종종 찾아 볼 것 같다.

 

스무 살의 나의 청춘아. 하루라도 꿈꾸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날들아. 잘 있니? 나 여기서 잘 있어. 넌 지금도 만년필로 시를 쓰고 있니? 파란 잉크로 강을 만들고, 은모래 반짝이는 강가에서 지금도 미치게 그리운 백양나무를 그려내고 있니? 매미들이 유난히도 울어대던 여름날의 그때를, 그래서 넌 그토록 눈부신 몸부림 때문에 지금도 괴로워하니?-본문

아르's 추천목록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도종환저

 

 

독서 기간 : 2013.11.15

 

 

by 아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아르's Review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서 한낱 배구공에 불과한 윌슨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그 순간 눈물이 울컥했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수 많은 배구공 중 하나이겠지만, 영화 속 윌슨은 주인공이 4년이라는 시간을 무인도에서 보낼 수 있는 버팀목이자 유일한 친구였기에 거친 풍랑 속에서 윌슨을 떠나 보내야 하는 척 놀랜스가 흘리는 눈물을 보며 나 역시도 감정이 이입되어 오래 된 친구와 결별해야만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가 무인도에서 혼자 남겨진 한 남자의 생존에 관한 사투를 그린 내용이라면 실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소설은 문명과 이른바 야만이라고 일컫는 시간을 모두 지내온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순히 생존에 대한 기적을 넘어 문명-야만-문명이라는 메커니즘을 지나온 그의 삶은 아직까지도 무어라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17세의 나이에 혼자 외딴 섬에 버려진 나르시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선원들이 배를 돌려 올 것이라 믿고 있다. 한 때는 간절히 믿었던 구원의 바람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섬 안에 있던 토착민들의 삶 속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을 그를 잊어버렸다. 이미 죽은 자로 기록되어 있던 나르시스는 17년이란 세월이 지나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다른 선원들에 의해서 발견되지만, 희한하게도 그는 이전의 그의 삶은 모두 망각한, 그야말로 토착민들과 동일한, 야만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천만의 말씀이죠! 이건 잠긴 수도꼭지를 다시 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그자의 가장 깊은 기억 속에 있는 샘을 어떻게 파내고, 또 거듭 파내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 샘은 어쩌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한 방울, 한 방울 겨우 스며 나오게 될지도 모르고, 자친 완전히 말라 버린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영영 프랑스어를 말하지 못할는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본문

 우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야만인으로 변해버린 나르시스를 구조한 이후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발롬브륑의 이야기와 나르시스가 버려진 시점부터로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섬에 홀로 고립되었던 17년 나르시스의 시점과 17년 후, 야만인으로 변해버린 그를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로의 회귀를 위해 돕고 있는 발롬브륑의 시점으로 나누어 이야기는 전개되며 그 이야기를 쫓다 보면 과연 세상에서 고립되면서 섬 안에 있던 그와 섬을 벗어난 후의 그가 누구인지, 그 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게 된다.

 자네는 해변에 혼자 남았지…… 배는 이미 떠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자네는 알 수가 없었어….”

 그 다음…… 그 다음에는….. 나르시스가 아니었어……” (중략)

 그 다음에는 나르시스가 아니었고…… 그 전에도 나르시스가 아니었고….” 그럼 둘 사이에는 어땠지? 거기서 자넨 무엇이었냐고!  그 세월 내내 말이야! 자넨 누구였지…?”

 말하는 건, 죽는 것과 같아…..” –본문

 섬에 있는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름 조차 잊어버렸으며,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채 암글로로서 그 부족 안에 살고 있다. 17년 전 꿈 많은 소년이었던 나르시스가 낙오자가 되어 섬에 버려지는 동안 어떻게든 그 섬을 벗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렇게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 그는 토착민으로서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암글로로 살았던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제대로 발롬브룅이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는 토착민 사이에서 외제니와 샤를이라는 아들과 딸을 둔 단란한 가정을 이룬 삶을 지내고 있던 인물이었다.

저는 그를 우리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에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실례를 해서 몸을 더럽혔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리의 관습을 몰라서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 같은 인내심과 자상함으로 접근해야 하지요. –본문

 어찌되었건 나르시스로 17년만에 다시 프랑스로 귀국하게 된 그에게 발롬브룅은, 아니 그를 포함한 황태자비와 대공비 등 수 많은 이들은 그가 다시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 하루 빨리 정상적인 삶을 가질 수 있도록 그에게 다시 문명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동시에 그가 문명을 잃어버린 17년 동안, 즉 야만인으로서 살아왔던 17년은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르시스에게 현재 일반화된, 일명 문명이라는 이름하의 우리의 관습을 그에게 투입하면서 과거의 야만인으로서의 삶은 모두 토해내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나르시스는 언제나 묵묵부답으로 그의 과거는 일체 발설하지 않고 있다. 그가 모든 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그 순간까지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문명과 단절되었던 17년의 삶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듯 다른 쪽 뺨까지 내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천사처럼 관대한 태도로 응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면 한 방 먼저 맞고서 도저히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일 수는 없을 겁니다. 개는 맞으면 이를 드러내고, 아이도 학대받으면 할퀴려 드는 게 현실입니다. (중략) 그런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녁, 제 머릿속엔 나르시스가 보여준 그 유연한 태도에 대한 생각만 가득합니다. 단 하나 명확한 사실은, 그 몹쓸 싸움에서 흰둥이 야만인 나르시스는 도형수 빌보다 더 문명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본문

 잃어버린 17년에 대한 뚜렷한 정황을 밝히기도 전에 나르시스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렇게 아스라히 끝나버리는 소설을 보면서 순간 공허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다는 바람이 그저 독자들의 상상 속에 맡겨지면서 허무하게 끝나 버린 듯한 맺음에서 순간 울분이 터지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나르시스가 진정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르시스에게 그가 암글로로 살았던 삶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내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부족들을 어떻게든 찾아내,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문명을 끊임없이 주입시켜 사회화시키려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야만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 할 테고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른 삶이니 말이다.

 하지만 위의 나르시스의 행동에서 보듯 이 바지에 실례를 하는 야만인과 같은 나르시스가 있지만, 반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쓰지 않는, 우리보다 더 문명화된 나르시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반된 모습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 문명화 된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련히 사라져 버린 나르시스는 자신이 속해 있던 두 개의 문명 모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엇이 더 진보하고 그 나머지 것은 퇴행한 문명이 아닌 그들 나름대로의 문명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는 두 문명이 각각 숨쉴 수 있길 바랐는지 모르겠다.

 싱겁게 끝나버린 소설이라고 하기엔 책을 덮고 나서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과연 문명과 야만의 구분을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아르's 추천목록

  

로빈슨 크루소 / 대니얼 디포저

 

 

 

독서 기간 : 2013.11.12~11.13

 

 

 

by 아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