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서 한낱 배구공에 불과한 윌슨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그 순간 눈물이 울컥했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수 많은 배구공 중 하나이겠지만, 영화 속 윌슨은 주인공이 4년이라는 시간을 무인도에서 보낼 수 있는 버팀목이자 유일한 친구였기에 거친 풍랑 속에서 윌슨을 떠나 보내야 하는 척 놀랜스가 흘리는 눈물을 보며 나 역시도 감정이 이입되어 오래 된 친구와 결별해야만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가 무인도에서 혼자 남겨진 한 남자의 생존에 관한 사투를 그린 내용이라면 실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라는 소설은 문명과 이른바 야만이라고 일컫는 시간을 모두 지내온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순히 생존에 대한 기적을 넘어 문명-야만-문명이라는 메커니즘을 지나온 그의 삶은 아직까지도 무어라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17세의 나이에 혼자 외딴 섬에 버려진 나르시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선원들이 배를 돌려 올 것이라 믿고 있다. 한 때는 간절히 믿었던 구원의 바람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섬 안에 있던 토착민들의 삶 속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을 그를 잊어버렸다. 이미 죽은 자로 기록되어 있던 나르시스는 17년이란 세월이 지나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다른 선원들에 의해서 발견되지만, 희한하게도 그는 이전의 그의 삶은 모두 망각한, 그야말로 토착민들과 동일한, 야만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천만의 말씀이죠! 이건 잠긴 수도꼭지를 다시 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그자의 가장 깊은 기억 속에 있는 샘을 어떻게 파내고, 또 거듭 파내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 샘은 어쩌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한 방울, 한 방울 겨우 스며 나오게 될지도 모르고, 자친 완전히 말라 버린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영영 프랑스어를 말하지 못할는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본문
우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야만인으로 변해버린 나르시스를 구조한 이후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발롬브륑의 이야기와 나르시스가 버려진 시점부터로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섬에 홀로 고립되었던 17년 나르시스의 시점과 17년 후, 야만인으로 변해버린 그를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로의 회귀를 위해 돕고 있는 발롬브륑의 시점으로 나누어 이야기는 전개되며 그 이야기를 쫓다 보면 과연 세상에서 고립되면서 섬 안에 있던 그와 섬을 벗어난 후의 그가 누구인지, 그 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게 된다.
“자네는 해변에 혼자 남았지…… 배는 이미 떠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자네는 알 수가 없었어….”
“그 다음…… 그 다음에는….. 나르시스가 아니었어……” (중략)
“그 다음에는 나르시스가 아니었고…… 그 전에도 나르시스가 아니었고….” 그럼 둘 사이에는 어땠지? 거기서 자넨 무엇이었냐고! 그 세월 내내 말이야! 자넨 누구였지…?”
“말하는 건, 죽는 것과 같아…..” –본문
섬에 있는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름 조차 잊어버렸으며,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채 ‘암글로’ 로서 그 부족 안에 살고 있다. 17년 전 꿈 많은 소년이었던 나르시스가 낙오자가 되어 섬에 버려지는 동안 어떻게든 그 섬을 벗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렇게 17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 그는 토착민으로서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암글로로 살았던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제대로 발롬브룅이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는 토착민 사이에서 외제니와 샤를이라는 아들과 딸을 둔 단란한 가정을 이룬 삶을 지내고 있던 인물이었다.
저는 그를 우리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에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실례를 해서 몸을 더럽혔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리의 관습을 몰라서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 같은 인내심과 자상함으로 접근해야 하지요. –본문
어찌되었건 나르시스로 17년만에 다시 프랑스로 귀국하게 된 그에게 발롬브룅은, 아니 그를 포함한 황태자비와 대공비 등 수 많은 이들은 그가 다시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 하루 빨리 정상적인 삶을 가질 수 있도록 그에게 다시 문명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동시에 그가 문명을 잃어버린 17년 동안, 즉 야만인으로서 살아왔던 17년은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르시스에게 현재 일반화된, 일명 문명이라는 이름하의 우리의 관습을 그에게 투입하면서 과거의 야만인으로서의 삶은 모두 토해내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나르시스는 언제나 묵묵부답으로 그의 과거는 일체 발설하지 않고 있다. 그가 모든 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그 순간까지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문명과 단절되었던 17년의 삶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듯 다른 쪽 뺨까지 내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천사처럼 관대한 태도로 응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면 한 방 먼저 맞고서 도저히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일 수는 없을 겁니다. 개는 맞으면 이를 드러내고, 아이도 학대받으면 할퀴려 드는 게 현실입니다. (중략) 그런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녁, 제 머릿속엔 나르시스가 보여준 그 유연한 태도에 대한 생각만 가득합니다. 단 하나 명확한 사실은, 그 몹쓸 싸움에서 흰둥이 야만인 나르시스는 도형수 빌보다 더 문명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본문
잃어버린 17년에 대한 뚜렷한 정황을 밝히기도 전에 나르시스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렇게 아스라히 끝나버리는 소설을 보면서 순간 공허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다는 바람이 그저 독자들의 상상 속에 맡겨지면서 허무하게 끝나 버린 듯한 맺음에서 순간 울분이 터지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나르시스가 진정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르시스에게 그가 ‘암글로’로 살았던 삶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내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부족들을 어떻게든 찾아내,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문명을 끊임없이 주입시켜 ‘사회화’시키려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야만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 할 테고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른 삶이니 말이다.
하지만 위의 나르시스의 행동에서 보듯 이 바지에 실례를 하는 야만인과 같은 나르시스가 있지만, 반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쓰지 않는, 우리보다 더 문명화된 나르시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반된 모습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 문명화 된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련히 사라져 버린 나르시스는 자신이 속해 있던 두 개의 문명 모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엇이 더 진보하고 그 나머지 것은 퇴행한 문명이 아닌 그들 나름대로의 문명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는 두 문명이 각각 숨쉴 수 있길 바랐는지 모르겠다.
싱겁게 끝나버린 소설이라고 하기엔 책을 덮고 나서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과연 문명과 야만의 구분을 그 누가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