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 120 True Stories & Innocent Lies
황경신 지음, 김원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아르's Review

 

11. 잠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 듯 하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늦은 듯한 감이 있는 이 시간 동안 나는 주로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서는 누워서 책을 보곤 한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는 날도 있지만은 몇 줄을 내리 읽지 못한 채 계속 그 자리를 맴도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하루 동안 있었던 생각이나 그 이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 속으로 한 없이 빠져드는 경우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이성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감성적인 시간이 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에 그는 계절이 지나가는 시간마다 아침의 인사와 밤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나에게는 일어났으나 너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너에게는 희미했으나 나에게는 또렷했던 일. 나에게는 무거웠으나 너에게는 가벼웠던 일. 너에게는 잊혔으나 나에게는 문신으로 새겨진.

그 과거의 언젠가는 단 하루가 아니라, 여러 겹으로 짜인 날들의 씨줄과 날줄 속에 스며들어 미래의 언젠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를 테면 그 언젠가는 언제였던가. 배들로 항구로 돌아오고 사랑은 날개를 퍼덕이고 내 앞에 당신이 있었던. -본문

 

감성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버거운 것들이 아닌, 읽을수록 진한 느낌이 베어 나오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밤 늦게 시작된 독서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 책을 안고 있게 한다.

한 때는 가슴 시린 아픔이었을 이야기마저도 그는 참으로 덤덤하지만 그 때의 아픔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미 지나쳐버린 과거이지만 내게는 어제의 생채기처럼 남아있는 일을 그를 문신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눈 앞에 자리하고 있을 그를 다시 마주한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너를 다 그리진 못했지만 너의 일부를, 혹은 너와 나눠 가진 시간의 아주 사소한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약속을 그린 거라고 믿었다. 언젠가 내가 너를 잘 그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붙잡고 서투르게, 서투르게. 그리하여 그 질문, '내가 너를 그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당분간 의문형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어딘가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이렇게 많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고맙다. -본문

 

3차원 속 세계를 스케치북에 처음 그리게 된 날, 그는 그의 지인을 조심스레, 부끄러운 손길로 그리고 있었다. 헛헛했을 그 손길이 닿은 그 결과물을 보고서, '내가 있네'라고 이야기 해주는 그 지인이 있어서 훈훈했던 그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어서, 그들의 하루가 나에게까지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만약 올라가는 모든 것들과 내려가는 모든 것들이 온전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쉽게 지쳐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별 재미도 없겠지, 라는 생각도 든다. 온전한 것들 사이에 반음이 끼어듦으로써 '완전'해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사실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본문

 

피아노 음계에서마저도 하나의 인생을 읽어내는 그의 이야기를 보면서 밤 11시가 훌쩍 넘은 새벽 1시로 넘어가고 있었다. 가을에서 시작된 여름까지의 여정 동안에 하루하루의 숫자가 담고 있던 의미를 넘어선 이야기들이 참 포근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의 하루는 다 지나가고 내일의 하루가 다가오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 걷다 보면 소담스러운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닐 것만 같다. 한 권을 금새 읽어버린 것이 아쉬울 만큼,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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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나서 / 황경신저

 

 

독서 기간 : 2013.11.16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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