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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윤은오 옮김 / 아테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헤밍웨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지극히 단편적인 프로필 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만 털어놓으시지.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미국 태생의 마초작가로 부인을 네 번이나 갈아치운 화려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쿠바에서 엄청난 수의 고양이를 키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양이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 말고는 흥미로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말년에 권총자살을 했다는 것도 빠져선 안 될 사실이지. 좀 더 덧붙인다면 모델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손녀딸 마고 헤밍웨이라는 존재가 있을테고.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중학교 때 문고판 책날개에서 접했던 드라마틱한 그 몇 줄의 삶에서 한 발자욱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네 서점을 두리번거리다 이 멋진 책을 발견한 것은 정녕 행운에 가까운 일이다. 그의 말처럼 파리에서 살아보는 행운은 잡지 못했지만 젊은 시절의 배고픔은 좋은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헤밍웨이를 아직 더 늙기 전에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삶의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파리에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충분히 있다면, 그렇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이 어디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
그는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파리로 온 이래 까페 되마고에서 커피 한 잔이나 맥주 한 컵을 시켜놓고 배고픔을 참으며 하루종일 글을 썼다. 그리고 실비아 비치가 경영하는 '세익스피어 컴퍼니' 서점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아직 예술가들이 보잘 것 없는 신용으로도 분에 넘치는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 자리에는 에즈라 파운드나 스콧 피츠제랄드같은 대단한 작가들이 함께 했고 조금만 눈을 돌리면 그 시대의 독특한 아이콘 거트루트 스타인과 앨리스 B. 토클라스도 보인다. 아, 두근두근거린다.
그리고 그 시절 사람들은 늘 술에 취해 형편이 없었지만 적어도 친구의 작품에 대해서는 비난을 삼가야 한다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헤밍웨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에즈라 파운드의 수치스러운 전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좋은 친구였고 언제나 모든 친구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에즈라 파운드가 시인 T.S 엘리어트를 위해 은행에서 나와 시를 쓸 수 있도록 벨 에스프리 후원기금을 마련한 일은 다시 읽어도 가슴이 벅차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은 따로 있다.
어쨋든 우리는 여전히 너무나 가난했고, 나는 항상 점심식사에 초대되었다고 말하고는 두 시간 동안 뤽상부르공원을 산책하면서 글을 썼으며 그리고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훌륭했던 점심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적게나마 절약을 하곤 했다. 스물다섯의 한창 나이에, 당연히 중량급의 체중이라 식사를 거를 때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p139)
그 시절 점심을 거르는 일이 많아 늘 배 고픈 상태였지만 오히려 더 맑은 정신으로 생각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기쁨이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단편이 많이 팔릴 거라는 소박한 믿음이 전부였지만 청년 헤밍웨이는 그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음은 그의 말처럼 덧없는 봄이라 사랑도 변하고 젊은이도 결국 늙은이가 된다. 그게 삶의 법칙이다. 생에 어느 순간 잃어버린 계절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은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하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이었고, 우리가 이 카페 테이블의 나무를, 혹은 대리석판을 두드린다 해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다. (p236)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부디 시를 쓰고 술에 취하고 사랑을 나누자. 그리고 가난한 젊음을 축복하자.
헤밍웨이 사후에 출간된 이 에세이의 원제는 '파리는 축제다'로 20대 청년기를 보낸 파리 시절에 대한 시니컬하지만 정감어린 회고록이다. 60대 노인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위트 넘치며 분명 후회없는 삶을 살아온 이가 그러하듯 쉬이 회고조로 흐르는 법이 없다. 골치아픈 과거와 맞짱떠야 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어떤 젊은이보다 신랄하기 짝이 없지만 역시 그 더께에는 무시할 수 없는 깊이와 연륜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에는 잘 익은 상처는 포도주처럼 좋은 향기가 난다는 말이 상찬으로 따라와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번역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