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러 노트 - 프로파일링 기법을 확립한 전직 FBI 요원의
로이 해이즐우드.스티븐 G. 미초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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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사건을 조사하면서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의 범위가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둘째, 인간이 성적 자극을 느끼는 요인이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 우리가 많은 범죄에서 어떤 유형이나 공통 요소를 찾을 수는 있지만, 다른 범죄자와 정확히 똑같은 방법을 쓰는 범죄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어두운 마음의 `어둠`은 정말로 무한하다.˝

무더운 여름날, 가볍게 읽기 위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그러나 전혀 가볍지 않았다. 저자 로이 해이즐우드의 문체나 설명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에 별 무리가 없으나, 그가 책에서 소개하는 범죄의 유형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잔혹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심적 충격을 느꼈다. 책에 등장하는 범죄 중 대부분은 가학-피학적 이상성욕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내용이 하도 기괴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인간 심연의 끝은 어디인지, 이런 범죄자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로이 해이즐우드는 FBI의 행동과학부에서 22년간 재직한 베테랑 프로파일러(사실, 프로파일링이라는 기법을 그가 확립했다고 한다)이다. 해이즐우드는 이 책에서 `잭 더 리퍼`처럼 유명하거나, 재직기간 중 그 자신이 다루었던 살인/범들의 행동과 심리를 분석한다. 책에 등장하는 케이스들은 대부분 이상성욕과 관련된 성범죄-살인사건들이며, `그것이 알고싶다` 보다는 괴상한 C급 고어필름에나 등장할법한 잔혹하고 끔찍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묘사하는 해이즐우드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냉정하지만 나로서는 불필요하게 자세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 <의식적이고 가학적인 살인자>에서 저자는 범죄자들이 왜 범죄를 저지르며, 어떤 범죄 유형들이 있는지 등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2부 <신원 불명의 살인자를 찾는 프로파일러>에서는 수사 과정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실제 사례를 들어 소개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프로파일링은 편리한 만능 마법이 아니며 모든 물적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이 선행된 후에 찾아야 하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것이다. 범죄심리 전문가 표창원이나 이수정 교수 같은 이들이 유명해지면서 프로파일링에 대해 로맨틱한 개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예를 들면 나-_-)이 읽으면 의외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전반적으로 끔찍하지만 흥미로운 책이었다. 다만 저자가 성에 대해 무척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는 ˝내 생각에 일탈 범죄가 증가한 주요 원인은 미국에서 한때는 무척 엄격했던 행동 규범이 점차적으로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 전반에서 정상적이라고, 혹은 용인할 수 있도고 여겨지는 것이 범죄 행동에 반영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고 쓴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포르노그라피의 증가, 애널섹스나 오럴섹스와 이물질 삽입에 대한 대중매체의 호의적인 시선, 심지어 피어싱이나 상호 합의된 완력이 동원되는 `거친 섹스`가 (그 자신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긴 하지만) 현대의 성범죄가 과거보다 더 폭력적이고 복잡한 이유들이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다지 수긍이 가지 않는 주장이지만 , 그가 22년동안 프로파일링 작업을 하며 목격해왔을 시궁창들을 생각하면 별로 놀랍지는 않다. 그의 말마따나 어두운 마음의 `어둠`은 그 깊이나 넓이가 정말 무한하다. 알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담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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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0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프로파일러 여전히 정부지원 제대로 못 받아 해외교육은 고사하고 스스로 인터넷 뒤져 논문 번역해서 본다는 실상을 듣고...참담했습니다-_-
 
희망의 불꽃 - 뉴욕의 빈민가 아이들과 함께한 25년
조너선 코졸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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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코졸은 미국의 유명 교육자이자 저자입니다. 책 날개에 적힌 약력에 따르면,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수학한 코졸은 `보스턴의 흑인 거주 구역에서(...)랭스턴 휴스의 시를 수업 시간에 다뤘다는 이유로 해고`된 뒤, 미국의 공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진보적인 시민운동에 헌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희망의 불꽃>은 지난 25년간,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선거구인 뉴욕 사우스브롱크스 지역에서 코졸이 만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절대적 빈곤,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이들,열악한 교육환경...동정심은 가지만 너무 진부한 이야기 같다고요. 하지만 <희망의 불꽃>은 빈곤이나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주로 부르주아 백인들의) 동정심이나 자선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그보다, <희망의 불꽃>은 뉴욕의 가장 지독한 빈민구역에서 생존해 나가는 사람들의 연대기입니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누구도 문자로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작고 연약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놀랍도록 크고 강건한 삶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습니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책의 1부 `과거의 그림자` 브롱크스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2부 `찬란한 빛`은 빈민가의 파괴적인 환경과 투쟁하며 자라온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이르는 시기를 따뜻한 필체로 담아낸 2부가 주는 울림은 깊고도 독특합니다. 놀랍게도 코졸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하는군요.

<희망의 불꽃>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 특히 제 기억에 남는 이는 앨리스 워싱턴이었습니다. 알콜 중독이던 남편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경험한 뒤 곧바로 집을 떠나온 워싱턴은, 십대 후반의 두 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빈민 수용 시설을 전전하다 브롱크스 지역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곳에서 워싱턴은 코졸과 길고도 특별한 우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날카로운 정치 의식과 신랄한 유머감각, 그리고 음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워싱턴은 매우 활력이 넘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에이즈 감염과 폐암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별세하고 말죠. 이 짧은 설명만 읽으면 자칫 앨리스 워싱턴이 그를 둘러싼 가혹한 환경의 피해자인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이는 희생양이된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했지만, 본인 스스로는 희생양이 되길 거부했다. 그이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그 일상을 곱씹고 뒤집어 보는 데서 얻는 기쁨을 무기로 삼아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갔다. 당시 뉴욕은 그이와 같은 계층과 인종에 속한 여성에게 혹독한 역경을 안겼지만, 그이는 역경 앞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이는 자신을 둘러싼 비열한 사회 구조를 뛰어넘었다. 총명함과 재치로, 그리고 부조리함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 비열한 사회 구조에 일침을 놓았다. 그이는 많이 웃었다. 그이는 직접 구운 소 갈빗살 요리와 감자 요리를 몹시 좋아했다. 그이는 일상적인 삶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어려움을 이겨 냈다.˝

책에는 이 앨리스 워싱턴처럼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많은 이들의 투쟁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반면, 정말로 환경의 피해자가 되어버려 비극적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는 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하지요. 코졸은 이에 대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어도 불행을 맞이하는 아이들은 있었을 것` 이라 일부 시인하면서도, 브롱크스와 같은 빈민 지역에서 성장한 아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풍조를 차갑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빈민 지역 아동들의 경우, 사회 구조에서 비롯한 기존 환경의 문제점은 `부모의 결함`, 혹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안이하고 허술한 표현으로 쉽게 무마할 수 있는 하찮은 문제가 아니다. 이런 표현은 미국이 빈민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혐의를 부인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학계와 정치곙이 악당들이 의존하는 최후 수단일 뿐이다.˝

파인애플, 제레미, 벤자민 등, <희망의 불꽃>에 등장하는 빈민가 출신 아이들의 성공적인 사례들은 극소수의 특수한 경우일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외없이 헌신적인 지역 성공회 신부와 교육자들, 뉴욕 안팎의 후원자들을 통해 특수한 기회를 얻었으며, ˝이런 자선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제도적인 형평성과 공정성을 보장하는 공교육의 성과를 대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아이들의 성공을 단순히 개인의 역량이나 운 좋음의 영역에서 축하할 것이 아니라,왜 이런 기회가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 출간 후 코졸이 NPR과 나눈 인터뷰에서 밝혔듯, ˝You shouldn`t have to be a little charmer to get an equal shot at education in America.˝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책에 기록된 여러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 만큼이나 인상깊었던 것은 저자 조너선 코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코졸은 워싱턴의 민감한 조언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어렸을때부터 자신이 보아온 브롱크스 아이들의 독립성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등, 빈민가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합니다. 그 자신의 글을 빌려 표현하자면 코졸은 `베푸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역학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독단적인 편견에 치우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희망의 불꽃>이 뉴욕의 빈민가를 다룬 진부한 신파나 딱딱한 보고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이야기들의 모음집일 수 있는 까닭은, 지난 수십년에 걸쳐 코졸이 이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엮어낸 촘촘하고 따스한 관계의 망 덕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책의 여러 부분을 울컥해가며 읽었습니다. 저 자신이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10대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책 속 아이들이 맞닥뜨려야했던 절대적인 빈곤이나 폭력과는 비할 바 아니겠지만, 20대 초반이 된 지금까지도 저는 자주 무력감, 열패감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코졸의 글을 읽으며 조금 덜 외로워진 까닭은, 마치 그가 책 속에서 소개한 아이들과 맞닿는 기분이 들어서였습니다. 먼 미국땅에 사는 얼굴도 모를 낯선 아이들이지만, 독서하는 내내, 이들의 성공은 저의 성공이었고, 또 이들의 실패는 저의 실패였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용감하게 살아가기를. 저도 함께 기운을 내야겠지요.

덧)중간에 인용한 인터뷰 출처입니다

http://www.npr.org/2012/11/26/165922118/jonathan-kozol-on-kids-that-survive-inner-c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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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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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러운 독서였다. 러셀은 이 책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선별적이거나 작위적인 예시만을 든다. 예를 들어 러셀은 가상의 어느 사업가의 불행한 삶을 `경쟁은 현대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활용하는데, 그보다는 이에 대한 통계나 심리학 연구 결과가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리꾼의 말마따나 ˝It would probaly be better suited to a blog than a book˝. 어떠한 구체적인 자료도 없이 저자가 일방적으로 펼치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저자가 버트런드 러셀이라 할지라도!

또한 러셀은 당황스러울 정도의 성급한 일반화를 저지르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소련의 청년들이 서구의 청년들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말한다던가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직업과 관련되지 않는 일반적인 관심사를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식이다(`일반적 관심사`). 나는 독서하는 내내 이 책이 1930년, 영국의 부유한 백인 남성 지식인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계속 상기시켜야만 했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러셀의 문장은 통찰력 있게 핵심을 찌른다. 결국 <행복의 정복>을 통해 러셀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은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불행해지고, 세상을 건강하게 욕망할수록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과 지구의 미소함을 깨닫고, 그 장엄한 흐름의 일부가 되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진부하지만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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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09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으로 쓴 서평을 처음 봅니다. <행복의 정복>을 다시 읽을 때 슈퍼맨님의 서평도 참고해야겠습니다. ^^

csp 2015-06-10 00:15   좋아요 0 | URL
평소 러셀을 흠모해왔던만큼 아쉬운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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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간단하게 글을 메모할 수 있다는 게 북플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장문의 글(내 기준 140자 이상-_-;;)을 쓰는 사람들이 신기했는데 버릇을 들여놓고 보니 그리 힘들지도 않군요.

얼마전 뮤지컬 레베카의 무대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고 흥미가 생겨 대프니 듀 모리에가 쓴 원작 소설을 구입해 읽어보았습니다. 댄버스 부인으로 분한 옥주현이 자신의 죽은 여주인, 레베카를 울부짖으며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섬뜩하고 강렬했거든요. 예전에 히치콕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감상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저에겐 큰 재미도 감흥도 없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댄버스 부인이라는 인물이 가진 기괴한 낭만성 정도 뿐이죠.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사실 막시밀리언 드 윈터가 그렇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아니, 이 사람에게 성격이 있기는 했던가요?). 하지만 전 가정부 댄버스 부인은 굉장히 로맨틱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앤 폰테인이 연기한 이름 없는 화자 앞에서 죽은 전 주인의 속옷을 쓰다듬는 부분에서는요. 페티시즘과 네크로필리아가 근사하게 결합된 이 장면에서 전 죽음을 초월한 로맨틱한 사랑을 본답니다.>

(출저: http://www.djuna.kr/movies/scrawl_2001_02_06.html )

소설은 주인공 `나`의 독백과 함께 시작합니다.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last night I dreamt I went to Manderly again...)˝ 으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도입부가 등장하죠. `맨덜리`라는 저택은 여기서 과거의 상징,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짧막한 시절의 유산, 아름답지만 슬프고 기묘한 곳으로 제시됩니다.

뚱뚱하고 무례한 어느 미국 부인의 시종 일을 하던 `나`는, 몬테카를로 휴양지에서 맥시밀리언 드 윈터라는 이름의 영국인 귀족과 사랑에 빠집니다. 맨덜리라는 아름다운 대저택의 소유자인 그는 가엾게도 일년 전 아름다운 부인을 사고로 잃었다고 하는군요. 우울하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맥심은 만난지 2주만에 `나`에게 청혼을 해오고, 가난하고 연고도 없는 `나`는 이를 선뜻 수락합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리고 수줍어요. 경험도 별로 없죠. 맨덜리라는 유서깊은 대저택과 맥심의 아름다운 전부인-레베카의 망령같은 존재감은 계속해서 `나`를 압박해옵니다. 설상가상 저택의 관리인이며 레베카의 몸종이었다던 댄버스 부인은 시종일관 적대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나`를 겁먹게 만들죠.

<레베카>는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읽는 내내, 저는 주인공인 `나`와 맥심의 모습을 안개낀 것 마냥 흐릿하게밖에 연상하지 못했어요. 이 둘은 듀나가 말한 것처럼 `성격이 없습니다`. `나`는 취미로 대단할 것 없는 그림을 그리는 젊고 소심한 여자고, 맥심은 신문에서 크리켓 경기나 찾아 읽는, 조금 예민한 성미의 중년 남자에요. 특별할 것도 없는 이 둘의 관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건 바로 맥심의 전 부인 레베카의 존재감입니다.

`존재감`이란 단어는 퍽 역설적입니다, 왜냐면 레베카는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든요. 레베카는 처음 소설에서 언급된 그 순간부터 이미 죽고 사라진 여자입니다. 마치 꿈 속의 맨덜리처럼. 그러나 레베카는 저택의 모든 곳에서,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큰 키와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굉장한 미모... 레베카는 부재함으로서 소설 전체에 굉장한 존재감을 떨치며 `나`를 위협하는 인물입니다.

특히 이 레베카와 가장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이어져 있는 댄버스 부인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소설로서든, 영화로서든, 뮤지컬로서든, <레베카>는 댄버스 부인으로 기억되는 작품일 수 밖에 없습니다. 레베카를 잊지 못해 매일 그의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의 방식대로 저택을 운영하고, 죽은 여주인의 옷가지를 황홀하게 펼쳐보이며 새로운 안주인에게 살의를 숨기지 않는 댄버스 부인의 병적인 태도는 정말 소름이 끼치고 오싹하죠. 심지어 마지막엔 그 넘치는 격정으로 자신에게는 온 세상과 마찬가지였을 맨덜리 저택에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춰버립니다....-_-;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 둘 다 끝까지 일관성있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몰개성하고 평면적인 `나`(작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드 윈터 부인`으로만 등장할 뿐이죠)나 역시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않는 맥심과는 정말 대조적이죠. 사실 `나`와 맥심의 로맨스는 너무 지루하고 고리타분해서 답답했습니다. 오히려 이들보다는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의 관계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듀나 말을 빌려 쓰자면, 진짜 미치광이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로맨틱하기 때문이겠죠.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 본인이 이런 대비를 의도했을 것이 확실한데, 그래서인지 행간을 읽으며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에 대해) 여러가지를 상상하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https://youtu.be/ttmTnMF3okg
(옥주현이 노래하는 `레베카`.)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섬뜩하게 로맨틱한 작품이었습니다.

덤1)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시종일관 자신을 어리고 미숙한 존재로 묘사하는데요. 갓 학교를 졸업한데다 별다른 연애 경험도 없다....고 계속 말하길래 정말 한 열 여덟살쯤 된 줄 알았습니다ㅍ_ㅍ; 스물 한 살이더군요. 저랑 동갑이던데요. 전 제 나이를 소설속 `나`가 묘사하는 것 마냥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좀 이상했어요.

덤2) 작품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레베카의 사촌인 망나니 알코홀릭 파벨은 우리집 강아지 이름이랑 똑같더군요. 웃겼습니다.

덤3) 시간에 대한 소설의 묘사도 인상적었어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에서와 달리, 원작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맨덜리 저택으로 상징되는 과거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젊은 아가씨가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드 윈터 부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럽을 방랑하는 대목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스물 한 살의 `나`가 빨리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면서도 강박적으로 기억한 사소한 순간 순간들은 악령처럼 집요하게 둘을 따라다닙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여주인의 방식이 유효한 맨덜리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기묘하게 뒤섞이지요. 레베카의 취향대로 꾸며진 정원과 침실에서, 그의 흔적이 역력한 머리빗과 사무용품 사이에서, `나`는 레베카와 그가 살아 숨쉬던 과거를 느낍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오히려 자신이 유령이 아닐까, 이 대저택의 손님이 아닐까 걱정하면서요. 아! 너무 소심한 성격 아닙니까? `나`같은 사람이 제 옆에 있으면 너무 답답해사 엉덩이를 걷어 차 주고 싶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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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smith: A Romance of the 1950's, a Memoir: (Paperback)
Marijane Meaker / Cleis Pr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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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꽤 된 책입니다만 간만의 북플 업데이트를 위해 엄지를 두드려보겠습니다.

짐시 시간 여행을 떠나볼까요. 배경은 1950년대 후반의 미국, 뉴욕입니다. 그때도 뉴욕은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혼재되어 흘러넘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만, 지금과 꼭 같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냉전을 경험하고 있었고 사회적.문화적으로 좀 더 보수적이었죠.

이야기는 이 텁텁한 시기, 뉴욕의 어느 레즈비언 바에서 시작됩니다. 펄프픽션 작가인 매리제인 미커는 어느 저녁, 자신이 평소 흠모해오던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우연찮게 맞닥뜨리고는 2년간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Highsmith : A romance of the 1950`s>는 1959~61년 사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와 나누었던 사랑에 대한 미커의 회고록입니다.

알다시피 방랑벽과 알코홀릭에 시달리던 하이스미스는 사랑에 빠지기에 이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비슷하게 미커 본인도 썩 훌륭한 연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의심과 질투도 심했던데다가, 하이스미스의 바람대로 함께 유럽을 여행하는 대신, 팬실베니아 교외에 집을 구입해 머물자고 고집스럽게 그를 설득하죠. 유럽을 사랑했던 하이스미스가 보수적인 분위기의 팬실베니아 교외에서 병든 식물처럼 생기를 잃고 술을 퍼마시게 되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요.

현실에서는 기피했을 것 같은 성격의 두 사람이지만-_-; , 책으로 읽기에는 이 둘의 전쟁같은 연애사가 더없이 즐거웠습니다. 당시의 시시콜콜한 일화들을 마치 수다떨듯 전달하는 미커의 서술 방식도 흡입력 있었구요. 미커와 하이스미스 둘 다 전업 작가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글쓰기에 자극을 주고 영향을 받은 과정에 대해서 책의 상당부분이 할애되어 있는데, 저 자신이 하이스미스의 팬이라 그런지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미국의 동성애자 문화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어요. 서로 네트워킹을 할 만큼 하위문화가 발달되어 있기는 하지만, 수면 위로 크게 떠오르지는 않았다는 점이 지금의 서울과 비슷하지 않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전반적으로 ˝Don`t ask, don` tell˝의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195~60년대 뉴욕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2010년대 중반의 서울의 분위기가 맞닿아 있다니 어쩐지 맥이 빠지죠.

말년의 하이스미스는 정말 불쾌한 종류의 인간이 되어버렸더군요. 미커와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캐쥬얼하던 흑인과 유태인에 대한 그의 혐오가 후에 망상 수준으로 강해진 걸 보고있자니 측은한 감정까지 들 정도였어요. 괴기스럽기까지 한 노년의 하이스미스 사진을 보고 있자면 젊었을 때 그가 이토록 매력적으로 생긴 여인이었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을 정도죠.

하이스미스 소설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저는 Scribd라는 어플을 다운받아 무료로 읽었어요.

책을 읽고 제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겠네요 : ˝예술가와 섹스를 하면 저주를 면치 못한다(이자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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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2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 여자가 하이스미스 맞습니까? 외모가 1950년대를 대표했던 미녀 배우 같습니다.

csp 2015-05-21 19:30   좋아요 0 | URL
네, 하이스미스 맞습니다. 하이스미스 노년의 괴팍한 모습만 알고 있다가 젊었을 적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 책의 내용에 따르면 하이스미스는 신사같은 매너와-_-; 훤칠한 키 등으로 당시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인기인이었다고 하더군요...

수이 2015-05-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같은 연애사_는 다시는 겪고싶지 않아요;;; 근데 이 언니 꽤 매력적인걸요_ :)

csp 2015-05-21 23:15   좋아요 0 | URL
확실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