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리샤 처칠랜드의 <신경 건드려보기>를 읽고 있는데 원저자의 문체 탓인지

번역이 영 매끄럽지 않다. 구글 번역기로 돌린 듯한 어색한 문장이 가독성을 떨어

뜨리는 탓에 책읽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번역이 정말 신경 건드린다.

 

 이 책의 저자인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남편 P.M 처칠랜드의<물질과 의식>

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 부부는 신경철학을 연구하는데 뇌과학과 심리철학

을 접목해서 신경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이 부부가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을  '제거주의(eliminativism)'라고 하는데 이름도

무시무시한 제거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한마디로 "의식현상을 설명할 때 일체의 비

물질적 요소를 배제한다" 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의 의식은 인간의 뇌(또는 신체)

와 동일하다는 심신동일론을 주장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다르게 말해서 뇌물리주의

라고도 하는데 가장 강력한 환원주의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은 알파고와 같은 인공 지능이 가능함을 뒷받침 하는 이론인데 이런

철학적 입장에 태클을 거는 비환원주의자들도 많다. 호주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을 단순히 뇌의 부수현상이 아닌 이 우주의 기본적 구성요소로 보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이 세계(전 우주의 구성요소가 아닌,,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우주의

90퍼센트는 암흑물질이고 나머지 10퍼센트 정도가 수소나 헬륨 같은 물질이다)의 구성요소는

 물리적 원소, 물리적 힘(전자기력, 핵력, 강력, 중력) 등인데 여기에 의식도 추가해야 한다는 것..

 

사실 나는 알파고는 인공지능도 아니고 알고리즘에 기반한 강력한 전자계산기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얼마전에 언론에서 알파고가 이세돌과 바둑대결할 때 워낙 인공지능이 어쩌고

저쩌고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지도 모른다고 겁주는 보도를 해댔었다.

덩달아 스티븐 호킹이라는 사람도 인공지능 연구는 인류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했었는데 내가 보기엔 스티븐 호킹이 좀 오버하지 않았나 싶다.

 

 알파고는 계산기일뿐이며 의식은 커녕 인공지능도 없다.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현상학에서

이야기하는 지향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지향성이 없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알파고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알파고는 바둑을 둔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한 것 뿐이다.

전자 계산기를 보고 지능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진짜 의식을 가진 존재라야 인간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개나 고양이가 지능은 있지만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일뿐임..

 

 이야기가 좀 다른길로 새버렸는데 아무튼 처칠랜드 부부의 제거주의 신경철학 분야는

앞으로도 꾸준히 찾아 읽을 생각이다. 남편인 p.m 처칠랜드도 <플라톤의 카메라>라는

책을 새로 냈는데 이 책은 가격도 만만치 않고 어려울 것 같아 구입 망설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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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병철의 책이 작년 가을부터 올해 5월에 걸쳐 두 권이 나왔다.

오늘 한병철로 검색어 넣어보니 나옴.

바로 주문. 요즘 읽을 게 없어 고민이었는데 일단 한병철 책으로

급한 불 좀 꺼야겠음.

그간 나온 한병철 책은 다 읽어봤는데 <투명사회>는 세번 반복해서

읽을 정도로 좋았다. <피로사회>도 당연히 좋았음.

좋은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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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가을입니다!  8월이 아직  6일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가을분위기 나지 않습니까? ㅎㅎ 사무실 앞 느티나무 잎이 벌써 누렇게 말라가고 있고 며칠 전에 산행 갔더니 깊은 산속에서는 벌써 가을이 무섭게 내려앉고 있더군요. 올해는 가을이 빨리 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태풍 고니가 올라왔는데 굵은 장대비가 아침부터 시원하게 내렸습니다. 이놈의 비만 오면 이유없이 센티멘털해지는 것도 나이들어 가면서 새로생긴 병이네요..ㅎㅎ  그래서 오늘은 요런 비오는 아침에 어울리는 멜로 영화 한편 보고 왔습니다.

 

 가을과 낙엽, 영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분 있죠. 얼마전에 별세하신 팝 아티스트이자 유명한 DJ이셨던 김광한씨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도 없었던 때였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바로 KBS에서 토요일마다 한편씩 보여주던 명화극장이었습니다. 다들 기억나시죠? 이때 본 영화들 정말 좋았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 같은 영화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때쯤이면 김광한씨가 이 명화극장 예고방송을 했는데 그때 바바리 코트 입고 낙엽 우수수 떨어지던 장면앞에서 김광한씨가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인지 이야기 하던 장면이 떠 오릅니다.

 

명화극장 예고편에서 김광한씨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늦가을,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어떤 관객이 자신의 머리위에 낙엽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방금 보았던 영화의 여운에 휩싸여 골똘히 생각하며 걸어가게 하는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입니다"

 

오늘 본 영화<뷰티인사이드>란 영화도 바로 김광한씨가 이야기했던 그런 여운을 남기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매일매일 아침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설정자체는 황당하기 이를데 없고 식상하기도 하지만 그런 설정으로 사랑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시나리오가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설정은 이미 외국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이야기입니다.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시간 여행자의 아내>같은 영화가 떠오르네요. 제가 보기엔<뷰티인사이드>에서 남자주인공이 매일아침 모습이 변한다는 설정이 제일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TV에서 지겹게 보았던 한국 막드의 혈통에 대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사랑이야기가 왜 이리 반갑게 느껴지는 것일까요?ㅎㅎ

(미국드라마 : 미드, 일본드라마 : 일드, 그럼 한국 드라마는? 한드가 아니라 막드라고 하죠. 막장드라마! 막드하면 꼭 나오는 장면이 바로 유전자 친자 확인서 보면서 울고불고 난리치는 장면들이죠~ㅎㅎ)

 

 

 아무튼 이 <뷰티인사이드>는 좀 오글거리는 장면도 많고 요즘 잘 나가는 남자 주인공도 대거 출연해서 볼거리가 많습니다. 연기력 좋은 배우들이 영화를 이끌어가고 영상미가 돋보이고 지루하지 않은 시나리오로 인해 몰입도도 높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본 영화였습니다. 수시로 눈시울 붉게하는 폭풍감성영화입니다. 영화내용중에서 여자 주인공 이수(한효주)는 우진(남자주인공)을 사랑하지만 우진은 매일매일 얼굴이 랜덤으로 바뀝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꼬마, 남자, 여자,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바뀌죠. 이렇게 매일매일 바뀌는 남자친구 어떨까요? 처음에는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결국 이수는 결국 매일 바뀌는 남자친구를 감당하지 못해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위의 누가 보더라도 주인공들의 사랑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남자를 바꿔가며 만나고 다니는 한효주가 헤픈 여자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남자친구가 매일매일 바뀐다는 사실을 이야기해봤자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야기해봤자 정신병자로 오해받지 않으면 다행인 그런 기구한 운명이 예고된 사랑이죠.

 

 그래서 영화중에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지만 때로는 사랑이 모든 것을 망치기도 한다"

 

 영화속 주인공들은 현실의 장벽속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고 마는 것일까요?

그러나 영화는 비극의 카타르시스뿐만 아니라 현실의 제약을 거스르는 힘을 가진 순수한 사랑의 힘에 무게를 둔

해피 엔딩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주인공은 멀리 외국에서 다시 재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죠.

 

"사랑해서 아픈 것 보다 헤어져서 아픈 것이 더 힘들었어"

 

 

 결국 인간은 사랑 그 자체로부터는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시말해, 사랑은 감기바이러스처럼 면역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늘 새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특히 남여간의 사랑은!). 지겹도록 진부하지만 항상 새로울 수 밖에 없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입니다. 매일 매일 밥먹고 잠자는게 지겹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이란 것은 너무나도 진부하지만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이 결국 인간 아닐까요~~

 

뷰티 인사이드는 화면구성도 아름답고 연출도 상당히 잘된 멜로영화중에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PS: 다가오는 가을에 뷰티인사이드랑 같이 보면 좋을 외국 영화 몇 편 더 추천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제레미 아이언 주연이고 액자식 구성으로 된 사랑이야기인데

                                    아름답고 유쾌한 영화입니다.

     <스틸 라이프> : 고독사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슬픈 사랑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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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해 독서모임 카페에 올렸던 글인데 먼저 리뷰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같이 쓴 글이다. 삭제해버리려니 좀 아까운 것 같아 저장차원에서 알라딘에 업로드해놓는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색한 부분도 있고 고치고 싶은 부분도 보이지만 그냥 그대로 둔다.  

 

 

 저는 얼마전에 실존주의 관련 책 몇 권을 읽었습니다. 지난 20세기는 실존주의의 시대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철학사조는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은 바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실존주의의 오야붕격이죠. 이분은 입으로만 실존주의를 외친게 아니라 자신의 삶 그 자체도 철저하게 실존주의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르트르는 당대의 같은 실존주의 여성 철학자였던 시몬느 드 보봐르와 계약결혼을 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시간제 애인입니다. 두 사람은 평생 애인관계를 지속하면서 자식도 낳지 않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보봐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유지하면서도 사르트르외에 여러 명의 다른 남자애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계약이란 것이 바로 서로를 절대 구속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이죠. 사르트르가 먼저 죽고나서 보봐르도 죽었는데 보봐르는 사르트르의 묘지에 같이 묻히는 그 순간에도 그녀의 손에는 사르트르가 아닌 다른 남자가 선물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계약을 어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로를 절대 구속하지 않기로 한 약속말입니다.

 

 2015년 현재의 윤리와 도덕으로 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독점적이고 배타적인데 어떻게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서로의 다른 연인을 묵묵히 인정하고 지냈을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과연 사르트르는 보봐르가 다른 연인을 만나고 다니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처님처럼 질투심하나 없이 초연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르트르도 인간인 이상 질투심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르트르였다면 계약결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보봐르한테 그놈이나 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다그쳤을 것입니다 ㅋㅋ

 

 요즘 인간관계를 다룬 자기계발서적이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라,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아라.. 그러나 그런 책들이 주장하는 삶의 태도는 빛좋은 개살구처럼 입으로, 말로 하기엔 그럴 듯하고 뭔가 있어보이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런 좋은 생각대로  실제로 살아나가는 건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수많은 윤리와 도덕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일은 극도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어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직접 가는 것은 철저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단순히 안다는 것은 순전히 내 머리속의 관념이라서 사회와 충돌할 일이 없는 반면, 그 앎을 직접 실천하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삶의 조건과 나의 육체가 직접적으로 사회와 부딪쳐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을 어떻게 치룰 것인가? 홍세화씨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결국 옳은 길이 아니라 쉬운길을 선택하고 마는 나약한 존재일까요?

 

  물론 쉬운길을 선택한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면 그런 선택을 한 사람을 비난할 수 도 없는 일입니다. 옳은길이 행복할지 쉬운길이 행복할지 불행할지 아니면 본전일지 그것은 오로지 그 선택을 한 자만이 오롯이 감당해야하는 몫입니다. 그리고 옳은 길과 쉬운길 사이에는 수많은 타협의 갈림길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찌됐거나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뭔가 선택해 나가야 합니다.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 이혼을 할 것인지 말것인지, 집을 사야 할 것인지 전세로 눌러 살 것인지, 지금 주식을 살 것인지 팔아야 할 것인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택에는 철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원칙입니다.

 

 가끔 나이 마흔이 훨씬 넘도록 투표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그 더러운 정치판을 초탈하여 산속의 도인처럼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으니 편하기 이를 데 없고 내 한표 행사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잘도 굴러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투표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도 져야 됩니다. 그 어떤 정치권력이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더라도 상관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먹고 안주하면서 편안하게 자신들이 속한 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해 법령과 제도를 만들어 갑니다. 마이클 센델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구도 정치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투표를 포기하면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을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당장 내 자식을 학교에 입학시켜 보십시오. 교육감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지 어떤 교육철학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아이의 학교생활이 크게 바뀝니다(대구는 맨날 똑같은 교육감이 해 먹으니까 별로 바뀔 것도 없지만 서울시 상황을 보면 달라질 겁니다. 얼마전에 경남 도지사가 학교에 공부하러 오지 밥 먹으러 오냐고 하면서 아이들 점심에 손을 댔죠.)

 

 사르트르의 책을 읽어보면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그런 선택을 하고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살아생전에 주장한 실존주의라는 사상은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솔직하고 실천적입니다. 사르트르 철학의 제1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금언이 있습니다. 바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서 영원히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문제삼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실존이라는 말은 이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우주에서는 인간만이 유일한 실존적 존재입니다. 칼은 자르는 본질이 먼저 있어야 하고 자동차는 사람이 편리하게 타고 다니는 기능상의 본질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칼이 먼저 생기고 자르는 기능이 생긴 것이 아니고 자동차가 먼저 존재하고 나서 타고 다니는 기능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외에 모든 존재는 이렇게 본질이 선행하는데 인간에게는 무슨 본질이 있을까요?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그 어떤 본질도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저 상황과 조건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다시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은 자유로 단죄받은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기로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기로 선고받은 대신 그 자유에 따른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무를 회피할 수 없습니다. 또 인간의 자유는 오로지 자유로서만 제한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와 보바르는 자유롭게 살기로 선택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상대의 다른 연인들을 묵묵히 용인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는 자유로서 제한된다는 원칙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가 소중한 것처럼 상대의 자유도 소중한 것입니다. 상대의 자유를 용인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계약결혼이 아닌 세속적 의미의 결혼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이제 왜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입으로만 실존주의라는 사상을 떠벌린 사람이 아닌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혹시나 제 이야기가 사르트르와 보봐르처럼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맘껏 자유연애를 즐기면서 살아야 된다라는 오해를 낳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남한테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수없이 많은 자기계발서적들이 "내 삶의 입법자는 바로 나" 임을 외치고 있지만 그런 삶을 직접 살고 싶다면 말과 글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직접 실행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자기계발서적들을 되도록이면 읽지 않으려 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나 자신만 발견할 뿐입니다. 공허한 자기위안만으로는 삶이 결코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기 위해서는 국영수를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영수를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기특하고 예뻐보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미래의 밥벌이를 미리 챙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이들한테 감히 플라톤이니 공자니 하면서 인문학을 들먹일 수 없습니다. 국영수도 잘 하면서 좋은 책도 많이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당장 내 자신부터 내 아이가 국영수 열심히 잘해서 좋은 학교, 좋은 학과, 좋은 직업을 가지는 걸 원합니다. 제 생각엔 국영수만 공부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국영수를 제대로 공부할 수 없는 현실이 더 문제로 보입니다. 국어,영어,수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인문학이나 과학을 할 때도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르트르는 결국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합니다. 사랑과 돈과 지위와 우정을 얻기 위해 허구헌날 평생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비루한 운명을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지만 다른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저 사람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또 역으로 남들도 나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도 다른 사람들한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저라면 아무도 없는 천국보다 차라이 타인들로 우글거리는 지옥을 선택하겠습니다.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지옥이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늘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계추처럼 쉬지않고 사랑과 사람을 찾아다녀야 야 하는 모양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본질도 목적도 없다고 했지만, 제가 보기엔 인간은 사랑과 사람사이에서 끊임없이 인생의 의미를 찾아나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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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 FETE.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와의 모든 만남을 축제로 체험한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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