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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대. 남편은 기대하는 말투로 말했지만 곰오디오의 파일 하나가 끝날 때쯤 시차적응을 핑계로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솔직히 나도 졸음이 슬슬 오는 것이... 그래도 "아오이 유우" 가 대체 여기서 어떤 역인지 봐야겠다는 집념으로 - 시작하는 크레딧에는 우에노 주리(스윙걸즈의 그 엉뚱한 아이..여기선 꽤 이쁘데.. 대체 토모야가 왜왜왜 이 우에노 주리를 제쳐놓고 미인마을 출신이라는 딴 애를 좋아라 하는지... 네게 급 라식 수술을 권장하마) 와 남주(극중이름은 토모야인데 실명은 격안남) 이름만 뜨고 우리 유우(급 친한척...;;; 누가보면 옆집사는 줄 알겠다) 이름이 안나오길래 그 집념(혹은 팬심?)으로 이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우리나라에 해적판으로 어마어마하게 떠돌고 뒷북 개봉으로도 상당한 관객을 끌어모은 전력이 없었다면, 무지개 여신이 먼저 개봉했다면 그래도 꽤 인상이 남았을지 모르는데. 무지개 여신은 러브레터 때문에 내게 그닥 여신의 포스를 끼치지 못했다. 왜? 러브레터의 쌍둥이 버전 같았거든. 늦게 도착한 편지. 늦게 도착한 편지는 내게는 두 가지 의미다. 첫째로는 영화속의 아오이의 마음이 그렇고, 둘째로는 이미 이런 이야기 다 알고 있는데... 라는 영화가 내게 주는 느낌이 그렇고.

남들이 보지 않는 책을 빌려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를 만들며 독서자 기재란에 자기 이름을 적어넣고, 그리고 마지막 장에 소녀 이츠키의 그림을 그려놓았던 소년 이츠키의 마음을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러브레터"와 비슷하게, "무지개 여신"에서도 토모야는 뒤늦게야 대학시절 무심한 척하며 그냥 좋은 친구로 털털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아오이의 진심을 알게 된다. 겉으로 다 표현은 못했어도, 그가 핸드폰으로 전송해준 무지개 사진을 핸드폰의 메인 화면으로 만들고, 대필해주던 연애편지 뒷장에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적어놓았던 아오이의 진심을. 사랑은 한발짝 늦게 전해진다. 파티가 끝나고 나서 도착한 초대장처럼. 타종한 지 한참 후에야 저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이와이 슌지가 각본을 썼다는 사전지식 없이도 우리에게 이런 스토리는 아주 익숙하다. 뒤늦게 밝혀지는 진심. 수많은 영화들이 이 뒷북순정을 주제로 했기에 이 분야에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기려면 중간에 너무 눈치를 줘서는 안되는데, 눈치를 주더라도 좀 잠잠히 줘야 하는데 <무지개 여신>은 약간 그런 면에서 약했던 것 같고, 그 진심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서 차곡차곡 뭔가를 쌓아가는 느낌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언니는 토모야군을 좋아했었어" 유우 니가 말하지 않아도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구;;;

하지만. 철없어보이고 어리버리하고 급 반하고 급 차이는 스타일의-_- 토모야는 그 이후로 조금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 그리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 너머의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정작 무지개 여신은 아오이의 마음을 제 때 전달해주지는 못했을지언정, 토모야의 마음을 조금은 자라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늦게 도착한 편지라 해도, 용서할 수 있는 이유라면 그 때문이겠지.

덧붙임 1. 아오이 유우(주인공 우에노 주리의 극중 이름이 "아오이" 인데 여기서는 배우 아오이 유우를 말하는 것임)는 조연이었다-_-;; 그래도 너의 새하얀 기모노와 해맑은 웃음을 볼수 있어서 언니는 행복했어.

덧붙임 2. 토모야와 결혼하려고 수작을 부렸던 그 34세 여자;;; 진정한 싸이코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속이기 전까진 진짜 26인줄 알았는데 민증 깐 순간 나도 토모야랑 똑같은 대사를 쳤다. "34살로밖에 안보여" 거울을 보면서 새삼 느끼지만 여자의 나이는 팔자주름으로 알 수 있는건가...

덧붙임 3. 이와이 슌지의 영화중 역시 최강은 "릴리 슈슈의 모든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 슈슈만이 순전한 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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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 Boy를 예전에 보았을 때는 "인간은 누구나 섬이 아니다" 운운하면서 거기 나온 명언을 이용해서(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거 본 조비가 한 말 아니지? 근데 왜 영화에서는 자꾸 본 조비가 한 말이래;;) 어쩌구 하면서 그럴듯하게 싸이에 리뷰를 썼던 것 같은데, 두번째 보고 나니 정말 뭐 그런거 다 필요없고 나에게 강력하게 메아리쳐 오는 울림은 "정상적인 엄마가 되어야 해!!!!" 이다.

솔직히 윌이 특별히 나쁜 점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마커스가 윌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엄마를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였든 어쨌든) 윌네 집 초인종을 리듬에 맞춰 누르면서 무단침입을 강행할 때 결국 포기하고 마커스를 집안에 들여보내 준 윌을 보면서 나는 "저놈이 원래는 진짜 착한 놈이구나.." 생각할 정도였다. 나같으면 끝끝내 씹었을 텐데. 그런 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단 말이야? 그리고 마커스네 엄마(이분도 참 계속 박복한 캐릭터의 연속인게 캐안습;;; 뚱보로 위장결혼하는 "뮤리엘의 웨딩" 부터 식스센스에서 애때문에 가슴이 쪼그라드는 가난한 엄마, 그리고 자살시도로 아들을 캐난감하게 만드는 이 영화에서 거의 박복의 화룡정점을 찍어주신다) 는 더더욱 이해가 안된다. 자살시도한 건 그렇다고 쳐, 자초지종도 듣지않고 식사하는 데 와서 우리아들 델고 뭐했냐고 난리치다가 윌이 따박따박 반박하고 나도 니들 안왓으면 좋겠어!! 하자 "아니 그럼 이 애를 그냥 냅두겠단 말야? 그건 아니잖아!!" 라면서 식스센스를 뛰어넘는 태도의 급 반전을 몸소 보여주시고,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뭐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르면서 영양가 풍부한 돌빵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아이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 시종일관이라는 사자성어는 이분을 위한 것인가 싶을 만큼 앞뒤가 안맞는 비합리적인 태도로 엔딩 크레딧까지를 맞이하시는 그분. 나는 그분을 보며 정말 정상적인 엄마가 되어야겟다고 다짐했다.

엄마의 자살시도 이후로 마커스에게는 어떻게 하면 엄마가 더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까? 만이 모든 관심사가 된다. 매일매일 집을 들어설 때마다 엄마가 자살을 시도하고 쓰러져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더 윌의 집에 불쑥불쑥 쳐들어간다. 아빠도 없고 엄마와 둘뿐인, 전학간 학교에서는 머리와 옷차림, 신발로 왕따당하고 사탕이 머리에 박히는 위기를 종종 경험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다. 그런 엄마가 자살을 시도하고, 문을 따고 들어가면 미친듯이 울고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 세계의 불안이다. 결국 마커스는 "네가 노래하면 내 마음속에 평화와 행복의 빛이 새어들어온단다" 라는 엄마의 말에 사회적 자살(social suicide) 을 각오하고 학교의 콘서트에 참여해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엄마가 자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이가 사회적으로 자살을 각오하게 만드는 엄마는 무서운 엄마다. 무지한 엄마는 무정한 엄마보다 어쩌면 더 무서운 엄마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신발을 도둑맞고 맨발로 빗길을 걸어와 울며 집에 들어왓을 때 그가 당한 일의 사태를 파악하기보다는 그 신발을 그가 너에게 왜 사줬냐!! 만 득달같이 다그친다. 학교 학생들 앞에서 마커스가 노래부르는 걸 윌이 말리러 가려고 하자 애가 노래부르는게 얼마나 좋은데 그러냐면서 사태를 파악하지를 못한다. 다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 나의 고통, 한없이 한없이 치받아 오르는 자기 연민. 그래서 아이를 고작 위한답시고 초코 시리얼은 일요일에만 먹어야 하고 맥도날드는 채식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금지 음식이다. 분홍색만 보면 눈이 홰까닥 돌아가는 은찬이네 엄마는 찰하리 귀엽기나 하지. 그걸 갖고 애들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외치게 만들진 않잖아. 나에게만 쏠려있는 관심으로 아이를 죽이는 엄마는 되지 말아야겠다.

물론 솔직해야지, 감정에는 솔직하고 억지로 강한척해도 애들은 결코 속지 않는 법이지만, 그래도 자기를 콘트롤하지 못하는 엄마가 되진 말아야 한다. 감정의 급반전으로 애가 대체 엄마의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를 모르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일관성없이 감정이 미친년 널뛰듯하는 엄마가 되지 않아야 한다. 뭐랄까, About a Boy 를 보면서 남편은 이게 정말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라면서 극찬을 거듭했지만(워킹타이틀이 만든 영화 목록을 다 찾아보면서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고 있음;;; 씨네마서비스에서 제작한 영화가 백편중 백편 다 좋던가요???) 나에게는 정말 울림있는, 제일 현실적인, 그리고 제일 공포스러운 호소력을 가진 메세지는 하나 뿐이었다.

정상적인 엄마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모자라고 부족한 엄마였어도 마커스에게는 하나뿐인 엄마였겠지만, 그 하나뿐인 엄마로서 더 마커스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녀는 노력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른다 해도 일관성을 지키는 훈련. 내가 사람돼야 애도 사람된다. 내가 안정되고 일관성이 있어야 애도 안정되고 일관성이 있는 아이로 자란다. 아직 애도 없는데 영화로 거의 태교했다-_- 물론 깨달음과 실행 사이에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마커스네 엄마는 나의 마음에 타산지석이라는 네글자를 "굵은헤드라인체" 로 떡하니 새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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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이희승 선생의 벽공(碧空)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릴리슈슈의 모든것, 을 보면서 나는 자꾸 그 시가 생각이 났다.


비빔툰 만화에서, 날마다 얼굴에 대패를 밀면서, 점점 나이들수록 얼굴이 두꺼워져서 큰일이야, 라고 하는 정보통 생활미 부부가 기억이 나는데. 어른들이라면 그저 그냥 기스 한번 났다고 심상하게 지나쳐 버릴 나날들을. 쨍 하고 금이 갈 듯, 그리고 와장창, 하고 산산이 조각이 나 부서져 버릴 듯한 지옥의 시간들을 보내는 아이들이 여기 있다.


여행도중 만난 외톨이 여행객이 해 준 교살식물의 이야기. 천천히 천천히 다른 나무를 휘감아가 결국 그 나무를 고사시켜 버린다는 교살식물. 사람들이 낙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속에 사는 생물들에게는 지옥일지도 모르지, 라고 그는 말한다.


애들은 교복만 입어도 예뻐. 니들이 고민이 뭐가 있니? 학생때가 제일 좋다. 라는 말을 무색하게 해버릴 만큼 아이들은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 속에서 지옥을 살아간다. 커다란 천체 망원경으로 별을 보여 주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친근하게 말하던 호시노, 함께 여행을 갔던 친구 호시노가 갑자기 9월 1일 신학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타인이 되면서 유이치의 잿빛 시대는 시작된다. 그러면서 유이치에게는, 릴리 슈슈만의 삶의 마지막 희망이 된다. 릴리 슈슈의 에테르만이 유이치를 숨쉬게 하고, 다른 세상은 매트릭스로, 릴리 슈슈만이 진실로. 그렇게 유이치는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호시노에게 강간당한 여자아이에게 "일(원조교제)"을 나가도록 시키고 그 돈을 호시노에게 전달할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창고로 데려가 호시노들이 강간하게 하며 무력하게 그 비명 소리를 들을 때, 그러면서 소리질러 울 때. 그때도 릴리슈슈의 노래는 흐른다. 아름답고 무심하게. 비정하고 몽환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무심한 카메라. 빨갛게 예쁜 연을 보고 해맑게 웃는 여자아이의 모습 뒤에는 바로 옥상에서 떨어져 머리에서 피를 콸콸 쏟는 모습이 이어진다. 그리고 "날고 싶어" 라는 청량한 그녀의 나레이션이 지나간다. 릴리 슈슈의 공연장, 왠지 음악으로 위아더월드~ 로 끝날 것 같은 그런 익숙한 풍경은 기대를 배반하고,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약속에 칼이 꽂히고 피가 묻는다. 자살하지 않을까 내 마음을 졸이게 했던 유이치는 전혀 다른 결말을 택하고, 쿠노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 등교한다.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며 상처주고 상처받던 아이들은 시골 들판에서 각자 홀로 서서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듣는다.


사람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만으로도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열다섯의 나날들. 신비롭거나 뽀샤시하지 않고, 그냥 생존과 공포와 불안과 잔혹함으로 얼룩진 나날들. 그럼에도 그 아이의 피아노치는 모습에 설레고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그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은 나날들... 그런데 아무도 밉지 않았다. 릴리 슈슈의 순전한 에테르 때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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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보직을 하는 업무특성상(전문성이라곤 애써 찾아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와있는 부서는 종이를 많이 만지는 부서다. 그러다 보니 종이에 늘 손을 베곤 한다. 학생때라봐야 만지는 종이라고는 책, 이지만 여기 와서는 교정지부터 감수볼 원고, 서류봉투, 각종결의서와 기안문... 하루에 프린트를 몇장이나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은 문득 이렇게 안아깝게 종이를 막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에 인용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백지장에 베이면 의외로 그 여파가 세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아얏!!" 하는 소리. 가장 약하다고 평소에 여겨온 것들에 한방을 맞을 때의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난 고개를 박고 서류철을 넘기다 넘어가는 종이에 눈이 베인적도 있다(프하하) 안과에서는 동공을 비껴가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이주일간 병원에 올 것을 처방했다. 남편은 종이에 눈이 베었다고 하자 걱정보다는 예의 황당한 웃음을 먼저 지어 부상자를 체휼하지 못하는 비정함을 보여주었다.

애니웨이, 손가락을 종이에 베어 피가 찌익, 하고 배어나는데 반창고는 없고(우리부서의 거의 대부분의 사무원들이 다 종이에 손을 잘 베는데 반창고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 역시 백지장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 갑자기 생각난 <봄날은 간다> 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처방해 준 피 멎게 하는 민간의학,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 손을 두고 팔래팔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억이란 건 내 짐작보다 강력해서 은수가 상우를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이른 봄날 손을 다치자 손을 위로 들고 흔들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했듯이, 그 은수와 그 상우를 지켜본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손을 위로 향하고 흔들고 있었다.

손을 베었을 때 그 망연함 가운데서도 떠오르는 기억이었다면. 은수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상우를 더 많이 좋아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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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1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날 제가 종이에 손을 베이고 이 페이퍼가 기억나면 어쩌죠? 훗.
(어쩌면 종이에 눈을 베었다는 일화가 가장 먼저 떠오를지도요.)
 

와호장룡을 보았다. 나와 남편은 결혼식날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신부화장에 신랑 머리 다 한채로,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 을 보러갔었는데. 그러나 그보다도 더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이안의 영화는 와호장룡, 이다.

주인공 장쯔이의 이름이 룡(龍)이지만 사실 그녀는 숨어있는(藏) 용이 아니었기에, 영화의 제목과는 연결시키기가 뭣하고, 그저 영화의 제목을 생각해 보자면 누운 호랑이와 숨어있는 용, 즉 영웅과 전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다. 는 뜻이다.  

전설의 보검 청명검의 행방을 둘러싸고, 가장 조신한 귀족 아가씨로 보였던 룡이, 사실은 푸른여우라는 고수의 사사를 받아 마침내 그녀를 넘어서는 무림의 고수가 되어가고 그녀의 승한 기재(氣才) 가 스스로를 어떻게 망가뜨려 갔는지를 다시한번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계기였다.

자신을 얽매고 있던 모든 신분과 관습을, 결혼식 행렬에서 과감하게 깨 부수어 버리고, 남장을 하고 주막에 들린 그녀는 그간 눌려왔고 숨겨와야만 했던 자신의 무공비급을 수많은 고수들 사이에서 드러내며 현란한 검사위 속에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천하제일 보검 청명검의 주인, 검의 여신, 오늘은 아미산에서 노닐며 내일은 무당산을 밟으리라!!

억눌려왔다가 이제 드러낼 수 있게 된 스스로의 재능에 도취된 그녀의 막무가내의 검술행진은 결국 미향에 중독되고 자신의 스승 푸른여우에 의해, 그녀를 뒤쫓던 리무바이를 죽게 함까지 질주해가고, 결국 이 모든 것이 허망함을 깨달은 그녀는 한 청년이 간절한 소망으로 뛰어내려, 그 소원을 이루었다는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어쩌면 가장 대단한 것은, 가장 위대한 영웅과 전설은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고자 하는 욕망들과 나를 과시하려고 하는 욕망들은 언제나 부글부글 끓고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영웅과 전설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지 모른다. 

푸른여우가 죽어가면서 용에게 남긴 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은 여덟살 아이의 거짓말과 같은 것이다"

나 한사람만을 지키고 드러내려는, 여덟살 아이의 치기어린 거짓말이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읽은 책 단 한 권으로 세상을 안다 생각하고, 내가 경험한 단 한가지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량하는 그 독으로부터 벗어나

누운 호랑이, 숨은 용의 미덕을 배우라고 하는 현명한 경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즘이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나. 장쯔이의 또박또박한 보통화 발음이 아주 듣기 좋았다. 장쯔이의 발음 외에는 이제 자막이 없으면 들리지도 않는구나...

 쓸데없는 이야기 둘. 로맨스로도 읽기에 충분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끝끝내 펼치지 못하고, 이제서야, 중년의 나이에 와서야 가까스로 손을 맞대어 본 사형을 그대로 보낼수밖에 없었던 수련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쓸데없는 이야기 셋.  펼쳐지는 중국의 풍경들을 보면서. 2001년 이후로 밟지 못한 중국에 대한 새삼스러운 그리움이 생겨나다. 언제 갈수 있을까..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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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1-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명검을 두고 생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영화 같아요. 근데 파란달님, 결혼 하신지 얼마 되지 않나봐요. 신부화장 한 채로 브로크백 마운틴을 남편분과 함께 보러가셨다니요. ^^ 왜 제가 다 기분 좋지요! 종종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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