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환보직을 하는 업무특성상(전문성이라곤 애써 찾아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와있는 부서는 종이를 많이 만지는 부서다. 그러다 보니 종이에 늘 손을 베곤 한다. 학생때라봐야 만지는 종이라고는 책, 이지만 여기 와서는 교정지부터 감수볼 원고, 서류봉투, 각종결의서와 기안문... 하루에 프린트를 몇장이나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은 문득 이렇게 안아깝게 종이를 막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에 인용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백지장에 베이면 의외로 그 여파가 세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아얏!!" 하는 소리. 가장 약하다고 평소에 여겨온 것들에 한방을 맞을 때의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난 고개를 박고 서류철을 넘기다 넘어가는 종이에 눈이 베인적도 있다(프하하) 안과에서는 동공을 비껴가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이주일간 병원에 올 것을 처방했다. 남편은 종이에 눈이 베었다고 하자 걱정보다는 예의 황당한 웃음을 먼저 지어 부상자를 체휼하지 못하는 비정함을 보여주었다.
애니웨이, 손가락을 종이에 베어 피가 찌익, 하고 배어나는데 반창고는 없고(우리부서의 거의 대부분의 사무원들이 다 종이에 손을 잘 베는데 반창고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 역시 백지장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 갑자기 생각난 <봄날은 간다> 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처방해 준 피 멎게 하는 민간의학,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 손을 두고 팔래팔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억이란 건 내 짐작보다 강력해서 은수가 상우를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이른 봄날 손을 다치자 손을 위로 들고 흔들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했듯이, 그 은수와 그 상우를 지켜본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손을 위로 향하고 흔들고 있었다.
손을 베었을 때 그 망연함 가운데서도 떠오르는 기억이었다면. 은수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상우를 더 많이 좋아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