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외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버스가 한 대 밖에 없었고 그 마저도 배차 간격이 좀 길었던 듯하다. 그 버스의 종점이 외할아버지 댁 근처였다. 외할아버지 댁 옆에도 2차선의 국도가 나있었지만 트럭이 간간히 오갈뿐 거의 한산한 느낌의 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어린 마음은 그 길의 끝자락이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콜럼버스의 전기에 나오던 세상 끝에 대한 삽화가 떠오르며 그 길 또한 어딘가 위험한 곳으로 나를 이끌 것이라 보았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금의 나도 내 앞에 놓여진 길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내가 나가야 할 길이 어디로 통할지 모르기에 세상이 그려놓은 삽화에 걸맞은 불안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기실 아무것도 아님이 분명한데도 내 마음은 어릴적 동심마냥 끝간데 없이 불안하고 촐랑거린다. 다 잘될거라는 말이 허황된 레토릭이 아니고 '이 순간도 다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고금을 막론한 진리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은 암세포마냥 마구 커나간다.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한 방법을 나름 모색해 보았다. 첫째는 운동이다. 둘째는 명상이다. 셋째는 친구고 넷째는 여유다. 이러한 조합이야 말로 허황된 레토릭을 갈음할만할 아스트랄한 방법이다. 모차르트의 제우스가 귓가에 울리고 노곤한 햇살은 시린 공기에 사람 냄새를 가져다 주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인생에 삼재(三災)가 있다 하였는데 이제 다 지나가지 않았나 하며 마음을 다시금 추스린다.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이처럼 불안에 잠식당한다면야 난 사회가 착취할만한 유용한 대상일 듯. 어쩔 수 없이 나만은 불안해하지 않겠다는 결기서린 눈빛을 스스로에게 쏘아 보낸다. 기실 불안을 활용하려다 잠식당한 사례이기에 쉬이 극복할 수 있을 듯. 이러다 진짜 신선이 되면 어쩔까 하는 또 다른 불안이 생긴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