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남자들은 소심하단 말을 제일 싫어한다. 이 말은 ‘루저’란 단어보다 더 큰 모욕을 주기도 한다. 다들 제 소심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종종 알심을 부린다. 소심하단 낙인이 두렵기 때문이다. 허나 알고 보면 다들 좋은 사람이듯, 알고 보면 다들 소심하다. 실제 대범한 이는 잘 알고 나서도 여전히 나쁜 사람의 수와 비슷할 테다.
소심함은 생존의 발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기실 소심하지 않은 사람은 사회생활하기 힘들다. 대범하단 이들은 종종 사소한 오해를 일으키고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행동이 가벼우면 잔망스럽단 소릴 듣고 행동이 격하면 파쇼 소리를 듣는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소심하다. 그 소심함을 얼마나 잘 감추는지가 쿨한 사람이 되는지 아니면 소심한 사람이 되는지를 가름 할 테다. 아마 소심하지 않은 사람은 2퍼센트 정도 되지 않을까.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의하면 태양인이 2%정도라 하니 그리 어긋난 추측은 아닐 테다.
소심함을 잘 포장하면 세심함이 된다. 기실 이런 섬세함이 없이는 한국 사회에서 버티기 힘들다. 서구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중종 때 조광조는 향약을 보급하며 나름 풀뿌리 공동체를 형성하려 한다. 대부분 농사일을 하며 정착 생활을 한 한반도민이다. 규약까지 더해졌으니 개인보다 공동체의 의거하여 삶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 더더욱 강화됐을 테다. 그러니 남의 눈치를 살피고 타인의 행동에 대해 품평하는 건 피에르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인의 ‘아비투스’다. 공동체의 규약을 따라야하니 주위를 엿살피는 일이 습관이 된 거다.
또한 레비스트로스 식 관점을 빌리자면 ‘예(禮)’라는 규범이 한국인을 꽤나 옮아 맨다. 일상에 자리 잡은 예의 치밀함은 천성이 착한 이들도 종종 무뢰배로 만들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정 노동이 일상화되었다. 결국 소심함은 천성도 있겠지만 ‘아비투스’가 강요한 한국인의 처세술이다.
헌데 서구 문화가 유입되면서 다들 쿨한 걸 찾으며 대인배가 되려고 한다. 물론 맹자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읊으며 대장부의 기세를 강조했다. 허나 한국의 유교는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자기수양의 도구로 활용하는 자들도 대부분이 선비였다. 이렇듯 군자를 찬양하지만 소인배를 양산했던 건 지난 세기의 과오다. 결국 쿨한 사람을 찬양하는 데는 한국 문화의 무의식을 극복하고 서구의 가치를 좇으려는 ‘옥시덴탈리즘’이 없는 지 살펴 볼 일이다.
이제 소심하다란 말을 하기 전에 소심할 수밖에 없는 문화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소심이 병인야 하여 우물쭈물하는 많은 사람들도 저를 탓할게 아니라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탓해야 한다. 이렇듯 소심하다는 타박은 남자를 위축되게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잘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다. 소심한 남자는 세심한 거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 일상화돼 있는 사람이다. 도닥여주지는 못할망정 헌걸차지 못한 기상을 꾸짖는 것은 스스로의 미욱함을 드러내는 제 살 깎아먹기다. 소심한 거. 비난받을 게 아니라 가여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