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미당의 시를 읽을 때면 난 정작으로 서럽다. 그의 모진 삶이 서럽고 그의 승한 재주가 서럽다. 허나 시조를 읊듯, 정갈한 운율이 넘실대면 모국어가 그리도 자랑스럽다. 그 말의 맛이 씹어도 씹어도 질리지 않을 듯하다.
시와 삶은 달랐다. 미당의 삶은 구접스러웠다. ‘종천순일자’라 제 자신을 감싼 그 야윈 말이 더 가여워 보인다. 글이 황홀해도 삶이 비루하니 그 찬란함이 옛 왕조의 기억마냥 아득하고 멀어만 보인다.
내가 처하지 않았던 시대고 내가 부딪히지 않았던 현실이다. 후세라는 이유로 그를 타박하기엔 내 행동 또한 말처럼 무겁지 않고 글처럼 올곧지 못하다. 뒤에 태어났다는 축복을 알지 못한 채 그를 꾸짖는 준엄함에만 몰두한다면, 나 또한 던적스런 삶이요 사람이다.
시인은 필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그토록 타인을 잘 헤아리고 그 마음을 흩트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육사나 윤동주의 올곧음은 찬양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기실 그들의 시는 울림 자체가 미진한 편이다. 섬세한 언어 감각이 여린 마음에서 솟아난다 할 때 미당의 나약함은 시재(詩才)의 반대급부로 내려진 천형이다.
시대를 잘 만났다면 시성(詩聖)으로 추앙받고 만수무강하며 고이고이 살았을 그네다. 그렇기에 조선 왕조의 미욱함이 안타깝고 사대부의 썩은 정신이 원망스럽다. 일제의 옮아 맴이 너무도 치밀했던 그 시절에 붓을 꺾기보단 붓으로 제 자신을 겹겹이 변명했던 그 나약함이 새삼 남의 일 같지 않다. 이렇듯 마음이 혼란한 걸 보면 나 또한 오늘 사소한 비겁함을 행했나 보다. 일상의 잗다란 비겁함을 감내하기 버겁기에 나 또한 미당을 쉬이 탓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