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가 내립니다.

소록소록 창가에 내려 앉은 봄비는

어느 시인의 가슴에도 봄빛물이 들게 합니다.

 

비가 오니 문득 이 싯구절이 생각났다. 오늘 내린 비는 가을비이니 봄비를 소재로 한 저 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빗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입 안에서 저 구절이 맴돌았다. 저 시는 3연으로 이루어진 짧은 동시다. 1연에서는 봄비가 개구리를 깨우고 2연에서는 새싹을 움트게 하는, 뭐 그런 내용인데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저 3연만은 또렷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아마도 숙제로 동시를 쓰던 12살의 아이가 저 3연을 완성할 때 참 많이 망설였기 때문인 것 같다. 시인이라는 단어를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5학년 녀석, 바로 나였다.

색도화지에 시를 옮겨 쓰고 그림도 그렸다. 이른바 '시화' 라는 것이 그 날의 진정한 숙제였는데 나는 좀 특이하게 보이려고 시도 세로로 썼다. 그리고 어설픈 손놀림으로 창을 그리고 나무랑 풀, 개구리 같은 것도 그렸다. 색연필로 색칠까지 마친 완성된 작품을 앞에다 두고 나는 괜히 시를 세로로 넣었나 하고 조금은 후회했지만 그래도 그 숙제때문에 기분나쁜 일이 생길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혼자서 벙긋 웃었다.

다음 날 국어 시간.
그 숙제를 걷은 후 교과서 몇 쪽의 문제를 풀고 있으라고 시킨 선생님은 뒤적뒤적 우리가 낸 작품들을 살피면서 교실 뒤 쪽 게시판에다 전시할 '시화'를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호명했다.

"어디에도!"

"네?"

"음... 이 시 네가 쓴 거니?"

"네??"

"이 시 말이야. 정말로 네가 직접 쓴 거냐구."

"네에..."

"누가 도와 준 거 아니구?"

"...네..."

"알았다."

취조라도 하는 듯한 선생님의 무서운 말투와 혼자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네네 거리고 있는 나에게 수십 개의 눈동자가 달려 들었다. 나는 한 순간에 정말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이 버얼개졌다. 야, 뭐야, 무슨 일인데?... 으응, 어디에도 시 보구 진짜로 직접 쓴거냐구... 지가 쓴 거 아니래? 몰라, 그런가봐...
실컷 얘기할 때는 딴 짓하다가 꼭 나중에 뒷북을 치며 뭐래 뭐래 묻는 아이들까지 가세해서 내 주위는 순식간에 웅성웅성 소리들로 가득찼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문제만 계속 풀었지만 웬지 서글픈 기분이었다.

다음 날, 뒷게시판 한 자리에 내 '동시'가 걸리는 것으로 나는 사건이 마무리 된 줄 알았다. 선생님이 그렇게 물어보신 것은 그래도 내가 조금은 잘 썼기 때문일테고 결국 내 시를 걸어주신 것도 그것을 인정하는 셈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쩌면 순간 흐뭇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희한하리만치 냉담했다. 친한 친구 몇 명만이 잘 썼다, 좋다 했을 뿐 대부분의 녀석들은 너 저거 누가 대신 써준거라며? 하고 나에게 대놓고 물었다. 하도 그러니 나중에는 아니야, 내가 쓴거야! 대답하는 것 마저 웬지 변명이나 우기기처럼 여겨져서 나는 하루 빨리 저것을 떼어 버렸으면 하고 계속 바랬다.

내가 '동시'를 쓰면서 '시인'이라는 단어를 넣을까말까 망설였던 것은 그 단어가 '동시'라는 것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는 '동시'라는 건 항상 밝고 예뻐야 한다는 생각에 심하게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웬지 사색적인 단어인 '시인'은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므로 탈락! 뭐 이렇게 생각했던 거였다. 그저 혼자 일기장에 글을 쓰고 낙서를 할 때는 어떤 이상하고 야릇한 단어를 쓰더라도 상관이 없지만 겉보기에 착하고 순진한 모범 4학년이고자 했던 나는 선생님께 검사맞기 위해 쓰는 일기나 온갖 글짓기 같은 것에는 교과서에 나올것 같은 말만 썼다. 나만 보는 일기장에다 온통 '고독한 삶'이니 '외로운 죽음'이니 하는 말들을 끄적이며 어설픈 어른 흉내를 낼 지언정 학교 숙제로 해 가는 동시에 '인생의 쓴 맛'이니 '외로운 몸부림'이니 하는 단어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한 나름의 이중생활의 부작용으로 나는 그날 그 동시를 쓰면서 시인이라는 별 것 아닌 단어를 앞에다 놓고 잠시 망설여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별거 아니잖아? 시인은 직업인데 뭘. 아니야, 그래도 동시랑은 좀 안어울리잖아. 그래, 너무 감성적으로 나가는 것 아니냐. 그럼 뭘로 바꾸냐, 농부? 광부? 회사원?... 아냐 아냐 아무래도 동시니까 아이는 어떨까... 아, 모르겠다 중얼중얼.

스스로를 조숙하다고 여겼던 나는 그 조숙함을 들키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그저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를 보면 어른들은 기특하다 생각하며 안심하지만, 일기장에 살기 싫다 어쩌구 써 놓고 소설이랍시고 야한 글을 끄적이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바로 경계경보를 울리면서 달려들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나는 조숙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사춘기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별로 없고 엄마 아빠 책만 많은 집에서 원했건 아니건 책장 속의 책들을 통해서 조금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흉내를 냈던 것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서 넘치는 건 그제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조용히 삼키고 마는 것도 똑같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은 선생님이 너 이거 네가 쓴 거 아니지? 하고 따져 묻는 상황에서 누구인들 조신하게 네에, 사실은요 우리 엄마가 대신 써주신 거랍니다, 하고 대답하겠나, 하는 거다. 5학년 때 내 시가 아무리 이상했더라도 그 선생님이 나만 조용히 불러다 물어보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의심해서 미안하다, 잘 써서 그런거다, 뭐 그런 칭찬 비슷한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었더라면 그건 아마 내가 들은 최초의 글 잘썼다는 칭찬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날도 집에 가서 데미안을 읽다가 지루해서 던져버리고는 구석에 몰래 숨겨두었던 금병매를 읽었다. 착한 아이가 되려면 가면을 써야 한다. 이것이 열 두살의 그 마음처럼 갑자기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이 이상한 글의 어설픈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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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9-0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조숙했군요. 전 그 나이에 남자애들이랑 뛰어다니며 힘자랑 했던 것 같은 기억만 있는데...^^

어디에도 2004-09-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블루님. 이 기분은 뭐죠... 웬지 님을 무지 오랜만에 뵙는 것 같은 이 반가운 기분은?
아, 근데 조숙, 아니라니까요. 그냥 혼자 삽질만 하던 시절인걸요, 뭘... 남자애들이랑 힘자랑, 정말 멋진데요. 님의 그 팩하고 있는 녀성의 이미지만 봐서 잘 상상은 안되지만^^ 힘, 세신가요? 흐흐

urblue 2004-09-0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하루 글 안 썼을 뿐인데, 무지 오랜만, 이라뇨? 님, 저를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녀요? ^^;
초등학교 때 다 커버려서 그 땐 힘이 좋은 편이었죠. 지금은 바람만 불어도 흐느적, 이랍니다.
리뷰 좀 쓰려고 컴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영 안되서 지금 놀러 다니는 중입니다. 잠을 너무 많이 잤는지 머리가 움직일 생각을 안하네요. 아웅...

urblue 2004-09-0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저도 음악 올리는 것 좀 가르쳐 줘 봐요.

비로그인 2004-09-0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어요. 어디에도님, 조숙하셨네요. 전 그 나이때 새 쫓으러 댕기면서 으이구, 우리 집은 꼭 농사를 지어야 허나, 기냥 공장같은데 아버지 들어가시면 안 되나, 깜밥을 가져와서 새 쫓다 배고프면 먹을 걸, 옆 집 고씨네 집 맏아들도 새 보러 와 있는데 함 말을 걸어, 말어..그런데만 신경을 썼거덩요. 같은 사춘긴데 왜 차이가 나는 거여!! 근데 시 참 좋아요..

어디에도 2004-09-0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헛, 복돌이님! 님의 사춘기 정말 정겹게 들리는데요. 함 말을 걸어, 말어... 너무 재밌어요. 우허허. 복돌이님은 님 스타일대로 확 말을 건넸을 것 같은데요? 손목도 확 잡아땡기고..헤헤
(오랜만에 올리신 글 잘 봤어요. 오랜만에 오시니 이리 반가울수가!!:D)

블루님, 바람만 불어도 흐느적이라뇨. 속은 골골해도 아무도 안믿어주는 천하장사몸매인 제 소원이 바람에 실려서 날아가는 거라구요! 흥!!
(아, 음악 올리는 것요... 저도 잘 모르는데 그냥 막 가르쳐드린거에요. 일단 이따가 님 서재에다 남길테니 보세요)

비로그인 2004-09-08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오랜만 아니고요. 늘상 들락날락했는데 소식을 올리지 못했습죠. 이 놈의 충정을 알아주시압! 헤헤ㅡㅡa

어디에도 2004-09-08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정! 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미천한 아랫것에게 그런 말씀 하시면
아랫것이 수이 보고 대듬니다요.
흔적 안 남기셔도, 오기만 하셔도, 소인 그저 좋습니다요, 마뉨.

플레져 2004-09-08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4학년! 자신의 소질이 불쑥 튀어나오는 나이인가봐요. 제게도 그 시절에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데...흠... 어디에도 님과 비슷한...
밀린 일기 숙제를 하다가 소년중앙에 있던 동시를 쬐금 각색해서 제출했답니다. 담임샘이 그만 그 시에 반하셨지요. 저는 어쩔줄 몰라했다지요. 그후로 담임샘께서 제가 쓴 글은 무조건 상장과 교환해 주시는 바람에... 저의 어줍잖은 글쓰기가 시작되었답니다 ㅎㅎ

플레져 2004-09-08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을 넘 잘쓰시네요. 아주아주 편안하게 잘 읽힙니다 ^^

하얀마녀 2004-09-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데미안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걸 12살 때 읽으셨군요.
역시 그 글솜씨가 그냥 나온게 아니었구만요. ^^

아영엄마 2004-09-0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는 그 나이 때 무얼 읽었을까... 잘 기억이 안나는디... 위인전이었나? 추리소설이었나? 어쨋든 숨은 아이님이 조숙했던 것은 맞네요! 아니 성숙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아, 그리고 가족채널~ㅋㅋㅋ 2525 뒤에 물결(~) 두 개 붙이셔서 찾아보시길..(2525~~)
어젯밤 12시에도 남편과 저는 게임으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였다지요~ 주로 컴퓨터와 3:5로 하거든요. 흠흠.. 저도 온리 플토유저인거 아시죠?

tarsta 2004-09-0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역시.. 하루아침에 나온 내공이 아니었음이야.. -_-....
근데 그 선생님 정말. 뭐에요 뭐에요.
좀 부드럽게 말해줬어도 좋았쟎아...이런 문학소녀를 몰라보고 말이야...쳇.입니다. -_-+

반딧불,, 2004-09-0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상처를 받으셨군요.

전 12살에 혼자서 빙벽이니,오싱이니 언니들 책을 훔쳐보았지만,
절대 학교에서는 그런 책 읽는다고 말 안했었지요ㅠㅠ
아마..벌써 금지된 것에 대한 욕구와 ...그것이 칭찬 받지 못할 것임을 알았었나봐요.

반딧불,, 2004-09-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참 놀랍습니다.
그때 이런 시를 쓰시다니요.

어디에도 2004-09-0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갑자기 칭찬을 한 가득 받으니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글솜씨니 내공이니 하는 말씀은 마세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니 제가 '5학년 때는 칭찬 못받았으니 거 한번씩들 해주시죠' 하는 분위기로 몰아가긴 했...지요? 헷)
플레져님, 글이 무조건 상장과 교환된다! 무지 부러운데요. 저는 글 써서 상 받아본 적 별로 없어요.^^
하얀마녀님... 데미안을 읽다가 집어 던졌다니까요.^^
아영엄마님! 물결 두개! 꼭 기억할게요. 스타를 하시면서 애정을 돈독히 하신다니... 부럽습니다. (저도 그렇게 재미나게 살고 싶어요^^)
타스타님... 문학소녀 흐흐흐 (중학교 한 때 자칭이었죠^^)
반딧불님... 우우 맞아요. 그런 책들 읽는다고 학교 가서 얘기하면 친구들이 좀 이상하게 봤어요. 별 것 아닌, 그것도 3연 밖에 없는 동시를 보고 놀라주시니 저는 더 놀랍습니다. 흐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