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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필경사 바틀비.
난 그런 사람을 모른다. 만난 적도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바틀비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만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 혹시나 내 안에 바틀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하지 않기로 선택한, 앉은 자리에 눌러 붙어버려 천천히 녹아내리고 싶은.... 그런 마음을 바틀비는 몸으로 표현한다.
나는 하지 않을 것을 선택했어요.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을 정도로 곤혹스럽다.
해야 한다고 하는 그 상황에서 기꺼이 할 것을 선택하면야 누가 뭐라겠는가.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면 그 선택의 근거를 따지기 전에 그 선택 덕분에 멘붕이 온다.
그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는 이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고, 죽음에 포위 당하는 중이었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가련하다. 바틀비의 가련한 운명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행복할 건덕지가 없는 말라 비틀어진 그 삶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포위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것.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함으로써 수동적 자유를 추구한 건 아닐까.
죽은 편지들.... 사라져버린 희망들.... 갇혀있는 그 곳에 싹튼 잔디처럼 말라 비틀어진 마음에 누군가 물을 부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